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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국민교육헌장

일제강점기를 연상시키는 국가주의 교육 강화를 놓고 맞선 권력과 저항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사건으로는 박정희 정권 시절 만들어진 ‘국민교육헌장’과 이를 비판한 ‘우리교육지표’를 꼽을 수 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12월5일 공포 직후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개인보다 국가와 국가발전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주입시키며, 민족·반공의식을 강변해 독재체제 정당화에 활용한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이 헌장을 모든 교과서 첫 장에 실으며 온 국민에게 암기를 강요했다. ‘반공’과 ‘민족중흥’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는 1993년 공식 폐기될 때까지 상당기간 공식적인 교육지표의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의 교육지표사건’은 유신 선포 이후 학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나날이 강화되면서 터져나왔다. 정부에 비판적인 교수들은 교단에서 쫓겨났고, 어용교수들이 득세했으며, 교수들은 지도교수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감시하고 학생시위를 막는 역할까지 요구받았다.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던 교수들이 ‘국민교육헌장과 유신헌법의 철폐’와 ‘학원과 교육민주화’를 요구했던 사건이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이었다.

1978년 6월27일 송기숙 등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은 비민주적인 교육정책을 비판하고 국민교육헌장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 참여 교수 11명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해직됐고, 30여명의 학생이 구속·제적·정학 당했다. 그러나 지난 2013년 관련자 대부분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고 이에 앞서 2007년 전남대에서는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민주주의에 굳건히 바탕을 주지 않은 민족중흥의 구호는 전체주의와 복고주의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민주주의 교육이 선행되지 않은 애국애족 교육은 진정한 안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기념비 문구 중 일부)

‘국민교육헌장’과 ‘우리교육지표’ 사건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통해 다시 한번 비슷한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경향신문(201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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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국민학교를 다녔으며 국민교육헌장을 학교에서 외웠다. 그 시절에는 국민교육헌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울 줄 아는 것이 자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국민교육헌장을 통해 애국과 민족정신을 강요했던 박정희 자신은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까지 써가면서 일본군에 지원했고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을 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며 민족의 반역자인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가 일제시대에 사용되던 교육칙어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일본은 패전후 국민학교(황국신민학교라는 뜻에서 유래)라는 명칭을 소학교로 바꾸었으나 한국은 95년까지 사용되었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우리 얼굴에 묻은 똥부터 닦아야 할 것이다. 민족의 반역자를 마치 유능한 지도자인것 처럼 왜곡하거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인권이라는 명목으로 보호해주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