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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주의의 시작과 배경

한국에서는 한족(漢族)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랑캐로 가르친다. 만주족이나 몽골인도 모두 오랑캐인 것은 물론 한국인은 자신도 한족이 불러준 예맥(똥고양이)이라는 애칭(?)의 오랑캐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특이한 일이다. 실제로 몽골, 만주, 한국인들은 큰 차이가 없는 민족이다. 만주에서 보면 압록강과 두만강이 만주와 한반도와의 경계가 아니라 백두산을 중심으로 서로는 선양(瀋陽), 북으로는 지린(吉林), 남으로는 평양, 함흥 일대까지가 거의 하나의 풍광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만주와 몽골인들을 한국인과는 전혀 다른 종족으로 더럽고 믿을 수 없는 오랑캐로 가르친다. 한족(漢族)은 특히 북방 민족들을 적(狄)이나 호(胡), 흉(匈), 맥(貊), 융(戎), 예(穢) 등의 용어로 지칭하며 비하했는데 그 이면에는 북방인들을 그만큼 무서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면 한국인들이 왜 이렇게 자존심도 없이 스스로를 비하하면서까지 북방인들을 천시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극단적이고 한족 중심주의적 중화사상인 성리학(性理學)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성리학이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된 것은 조선(朝鮮)이다. 따라서 조선 시대 이후 이 같은 경향은 매우 심각해졌다. 따라서 조선 건국 이데올로기를 기초한 정도전(鄭道傳)은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물론 그 시대적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지만 명나라가 안착하고 조선도 안정화되었을 때도 중국에서도 사라진 성리학으로 극단적으로 무장해간 것은 ‘역사적 이성’의 상실일 분만 아니라 정신사적으로 비극이다.

이성계는 몽고 군벌

눈을 돌려 북방사 특히 몽골과 만주의 역사가 극심히 왜곡된 이면에는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의 책임은 없을까? 한국에서의 북방사 왜곡은 이성계의 출신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윤은숙 교수(강원대)의 저서인 <몽골제국 만주 지배사(소나무, 2010)>에 따르면, “원이 망해가며 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귀순하기 직전까지 근 백년간의 그들의 조상과 그들은 몽·원제국 옷치긴 분봉왕 휘하의 엄연한 몽골국인이었다.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실록 총서>에 따르면,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는 삼척에서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 동북면 일대를 근거지로 구축했고, 1255년에 옷치긴(Otchigin : 斡赤斤) 왕가를 통해 몽골제국에서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직위를 받았다. 다루가치는 몽골족이 아니고는 좀처럼 잘 주지 않는 고위 군관직이라는 점에 있다. 13∼14세기 동북 만주지역을 장악했던 옷치긴 왕가는 이 방대한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대칸들은 개경과 심양에 각각 개성 왕씨 부마왕을 분봉왕으로 세워 옷치긴 왕가의 과도한 비대화를 견제하였다.(교수신문 2007.2.5)”고 한다.

분명한 사실은 이성계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고려가 아니라 원나라 국민이었다는 것이다. 즉 이성계는 원나라에 속하는 옷치긴 제국의 휘하의 고위직 군관이었다는 것이다.

옷치긴 왕가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면, 옷치긴(Otchigin) 즉 테무게옷치긴(1168∼1246)은 칭기스칸의 막내 동생인데 매우 용맹스러운 사람으로 칭기스칸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현재의 아무르강 일대에서 한반도 북부까지 다스린 제왕이다.

몽골 대평원을 통일한 칭기스칸에게 당시에 가장 큰 적은 공교롭게도 텝텡게르(Teb Tenggeri)라는 샤먼(무당)이었다. 유목민들에게 샤먼은 신(神)과 같은 존재로 칭기스칸의 개혁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이곤 했는데

예컨대 칭기스칸의 가족사를 기록한 <몽골비사>에 보면, 아홉 개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텝텡게르에게 모여들었다고 한다. 유원수譯 <몽골비사> (혜안, 1994) 215쪽.

칭기스칸에게는 ‘목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칭기스칸이 그를 제거하기도 어려웠다. 이 일은 맡은 사람이 바로 옷치긴이다. 이 때문에 칭기스칸은 옷치긴에게 제왕들 가운데 가장 큰 지역을 다스리게 했고[옷치긴 울루스(Ulus : 제국)의 성립], 자신이 서방원정(1219∼1225)을 떠날 때에 국정운영을 맡길 정도로 신임이 깊었다. 옷치긴 왕가는 13세기에서 14세기까지 유목과 농경을 모두 할 수 있는 땅을 받음으로써 제왕들 가운데는 가장 큰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옷치긴 사후 2대 왕은 타가차르(塔察兒)이다. 타가차르는 쿠빌라이의 최대 정적이었던 아릭부케(阿里孛哥)를 격파하여 쿠빌라이가 황제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옷치긴 울루스(Ulus : 제국)의 2대 제왕인 타가차르는 새 황제로 쿠빌라이(원 세조)를 선택함으로써 동방의 왕가들이 일제히 쿠빌라이편에 가담한 것이다.

쿠빌라이칸(원 세조)의 명령에 따라 항상 원정에 나서는 등 원나라 조정에서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멍케칸(헌종)이 1254년 고려 정벌 시에 예구와 타가차르를 파견하기도 했다.

1264년 쿠빌라이가 등극하여 황제위에 오르자 가장 큰공을 세운 사람이 타가차르였다. 그래서 타가차르는 원 세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서 “항상 쿠릴타이(일종의 화백 제도)에 참석하여 중대한 국사(國事)를 논의하였으며 매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타가차르는 독자적으로 원나라 조정의 법도를 어겨가면서 자신의 관할권이 있는 지역에 사신도 파견하고 민호도 소집하기도 할 정도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라시드 앗딘 <칭기스칸기> (김호동 譯註) (사계절, 2003) 91쪽.

그래서 몽골 침공 초기에 고려가 저질의 공물을 바치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서 사신 저고여를 통해 엄청난 공물을 징수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고려의 무신 정권이 대몽항쟁을 강화하는 구실이 되기도 했지만 당시 옷치긴 울루스에서 요구한 공물은 실제로는 몽골 조정과는 무관하게 옷치긴 울루스 자체에서 부과한 것으로 판단된다.

바로 이점에서 옷치긴 제국은 원세조(쿠빌라이칸)에게 가장 강력한 우방인 동시에 가장 두려운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윤은숙 교수는 심양왕 제도도 옷치긴 제국의 남하(南下)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옷치긴 왕가가 원나라 ― 고려 사이에 위치하면서 고려까지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이것을 중간에서 차단하기 위해서 심양왕을 두어서 서로 충돌시켜 옷치긴 제국의 영향력을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윤은숙 <몽골제국 만주 지배사(소나무, 2010)> 20쪽.

결국 원 세조가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1287년 옷치긴 왕가의 4대 제왕인 나얀(乃顔 : 타가차르의 손자)은 원세조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대항하여 동방의 제왕들과 반란을 일으켰다. 원 세조는 고령(73세)에도 불구하고 직접 정벌에 나서 나얀을 처형하였다.(1287)

나얀(乃顔)은 칭기스칸의 막내동생 테무게오치긴의 현손(玄孫)이다. 하이두(海都)가 원 세조(쿠빌라이)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동방의 여러 영주들도 반란에 가담하였는데, 이 당시 나얀이 맹주였다.

나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 충렬왕은 원 세조에게 즉각 지원군을 파견하여 동북지역의 안전을 일부 담당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얀의 잔당들이 상대적으로 허약한 고려로 몰려오면서 사태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충렬왕은 다시 원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1291년에야 반란이 진압되어 고려는 안정을 찾았다.

옷치긴 울루스의 귀족 이성계 가문

옷치긴 울루스(제국)은 이로써 다소 약화되었다가 1316년 요왕(遼王) 톡타(Toqta)가 임명되면서 다시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기에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이 태어났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가문은 이성계(李成桂, 1335~1408) → 아버지는 이자춘(李子春, 1315~1361 : 환조) → 할아버지는 이춘(李春 : 도조) → 중조부 이행리(李行里 : 익조) → 고조부 이안사(李安社 : 목조) → 이양무(李陽武)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문제는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와 그의 자손들이 주로 살았던 곳은 함경도 또는 현재의 옌지(延吉) 지역으로 이 당시는 고려 땅이 아니라 몽골의 영토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성계가 몽골인이었음을 당연할 것이다.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이춘은 보안테무르, 아버지 이자춘은 울루스부카라는 등의 몽골이름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원나라가 멸망(1368)하기 전 34년 전에 태어난 이성계에게도 몽골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叢佩遠 <中國東北史>(吉林文史出版社, 1998) 396쪽.

주채혁 <순록치기가 본 조선·고구려·몽골(혜안, 2007)> 참고

[그림 ➁]에서 보면 이성계의 선조들이 정착했던 지역은 현재의 옌지(延吉)나 두만강의 북부 지역 또는 함경북도 지역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안사(李安社)는 전주(全州)에서 170호를 거느리고 삼척을 거쳐 두만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가 원의 개원로에 소속된 남경(南京) 즉 현재의 옌지(延吉) 성자산성(城子山城)의 오동(斡東)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255년 이안사는 몽골제국의 산지(散吉 : Sanji) 대왕(몽골의 장군)의 도움을 받아 원나라로부터 남경 등지를 지배하는 수천호(首千戶)겸 다루가치 직위를 하사받았다.

당시의 천호장이나 다루가치는 그 지역을 관할하는 몽골 제왕들이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고, 임명하고 난 뒤 중앙정부로부터 허락을 받는 형태였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산지가 이안사를 다루가치로 임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옷치긴의 손자인 타가차르 대왕이 관할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산지라는 사람은 타가차르 대왕과 가까운 인물로 추정된다. 만약에 이안사가 몽골인이 아닌데도 다루가치로 임명되었다면, 타가차르 대왕의 두터움 신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안사가 고려에서 이주한 사람이고 그 시기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이안사의 다루가치 임명은 역사적 미스터리다. 고려의 이주민인 이안사가 언제 어떻게 거대한 영역을 다스리는 타가차르 대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 시기 즉 1255년 이후 원나라는 본격적으로 고려 전역에 주둔하기 시작하였고, 그 주둔 범위가 압록강에서부터 익산, 담양, 해양(海陽 : 광주), 나주, 목포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고려로서는 큰 위기 상황이었다. 당시 고려 조정은 원나라와 연줄을 닿기만 해도 그를 이용하여 원나라와의 외교 교섭에 동원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려 출신의 이안사가 그 정도의 유력인사였으면 고려 조정에서 그를 모를 리도 없었을 터인데 이안사는 <고려사>에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안사의 아들인 이행리는 <고려사>에 한번 등장하는데, 일본 정벌을 위해 파견된 홍다구(洪茶丘, 1244~1291)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즉 홍다구는 1281년 제2차 일본정벌 때 우승(右丞) 실도(實都)와 4만 군사를 이끌고 일본 정벌에 나섰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행리의 출신에 대한 애매한 서술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고려사> 편찬 과정에서 일부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즉 <고려사>에 “(1281년) 3월 갑인에 원나라 정동행중서성 우승과 홍다구가 고려로 왔는데, 그때 우리 익조(翼祖) 또한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이행리가 원나라 관리이므로) 동북면으로부터 고려 국왕을 뵙기 위해 재삼에 이르렀는데, 매우 공손하여 충렬왕이 말하기를 ‘경은 본래 사족(士族)이니 어찌 근본을 잊겠는가? 이제 경의 행동거지를 보니 족히 마음의 소재을 알겠도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충렬왕이 이행리에 대하여 “그대는 원래 선비 가문의 사람이니 어찌 그 근본을 잊겠는가?”라는 기록 하나로만 이성계 가문 전체를 고려인으로 담보해야하는 상황이다.

1290년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는 다른 천호장들과의 불화로 옌지 지역의 기반을 상실하고 쌍성총관부의 함주(咸州 : 함흥)로 이주하였고, 1300년 다시 원나라로부터 쌍성 등지의 고려군민들을 다스리는 다루가치로 임명되었다. 또 이 직위는 그대로 이자춘에게 세습되었다. 이것은 이성계 집안 자체가 옷치긴 왕가와 긴밀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려는 전 통치 기간을 통해서 이 지역을 제대로 다스린 적이 없고 특히 원나라 이후에는 옌지(延吉)에서부터 함주(함흥) 등의 지역에 대한 정치력을 한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 후일에 공민왕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길주까지 진출하여 오늘날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는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의 가문은 설령 그 선조가 전주(全州)에서 출향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수세대에 걸쳐 여진화(女眞化) 또는 몽골화된 귀족으로 봐야한다.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이춘(李椿)은 원나라로부터 아버지 이행리의 천호(千戶) 관직의 계승과 함께 발안첩목아(勃顔帖木兒)라는 몽골식 이름을 받았으며 이자춘(李子春)을 낳고 의주에서 화주(和州: 함흥 인근)로 옮겼다. 이자춘은 함경도 쌍성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며 원나라의 천호(千戶)로 있다가 1355년(공민왕 4)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 조정에 내알(來謁)하여 소부윤(少府尹)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바로 이 시기를 즈음하여 개경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이 때 이성계의 나이는 이미 20세가 넘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사실상 몽골의 귀족으로 봐야한다. 즉 이성계의 가문은 5대째 몽골의 고위 관직을 가진 군벌 세력이었던 것이다.[주13] 그리고 이성계 가문이 다스린 지역은 대부분 여진인(만주족)이었고 이성계 가문의 주축군도 여진인(만주족)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주14]

1355년경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이 고려에 귀부한 시기는 이미 원나라의 국력이 쇠약하여 후일을 기약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328년 원나라는 이른바 ‘천력(天曆)의 난’[양도내전(兩都內戰)]이 발생하여 카이산파의 엘테무르(연철)와 이순테무르파[태정제(泰定帝)파]인 톡타(요왕) 사이에서 유혈 충돌이 일어나 칭기스칸의 황금씨족(종실)의 내분이 심각하게 일어났다. 이 시기 원나라에서는 전성기를 지나 황위 계승에 따른 치열한 권력투쟁이 일상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설상가상으로 1342년 이후에는 천지지변이 많아 황하가 대범람하여 하남, 산동 등의 지역이 황폐화되었고 후일 명나라의 건국 세력인 백련교도(주원장)의 반란이 창궐하여 이미 남중국에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특히 1360년 아르카이 테무르(오고타이의 후손)가 반란을 일으켜 많은 몽골의 제후들이 호응하여 원나라 조정을 어지럽혔고, 강남을 장악한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1368)하면서 동시에 군대를 몰아, 대도(베이징)에 밀어닥쳤다. 1368년 7월 원나라의 혜종은 상도[上都 : 이전의 카이펑(開平)으로 현재 내몽골 중부의 시린궈러멍(錫林郭勒盟)]로 피신하였다.

이와 같이 이자춘(李子春)이 귀부한 10여년 동안의 기간은 원나라의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극에 이른 상황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이자춘은 “보다 안전한” 고려쪽으로 터를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에 있어서 이성계 가문의 전주(全州) 본관 문제도 다시 제대로 검정해봐야 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가문이 확실히 고려 가문이라면 어떻게 천호장과 다루가치를 누대에 걸쳐 세습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성계와 청태조(누르하치 아이씬조러)는 별로 다르지 않다. 청태조의 고향은 백두산으로 정확히는 함경도 종성 또는 중국 옌벤(연변)·룽징(龍井)의 하왕산 지역이라고 한다.[주15] 만약 이성계가 고려 사람이라면 청태조는 조선(朝鮮) 유민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의문 투성이의 이성계 가문 : 이성계 가문은 만주인 또는 몽골인

이성계의 직계 조상으로 알려진 이린(李隣 또는 李璘)은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의 후손이라고 한다.[주16] 이린은 대장군 이용부(李勇夫)의 아들로 고려 제18대 의종(毅宗)때 시중(侍中)을 지낸 문극겸(文克謙)의 사위이다. 이린은 이성계(李成桂)의 6대조이며, 아들은 이양무(李陽茂)이며, 손자가 이안사(李安社)라고 한다. 그런데 이린은 고려 무신정권의 실력자인 이의방(李義方)의 동생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고려사>(卷128, 列傳41, 叛逆2)에 나와 있다. <고려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① 이용부의 아들은 이준의(李俊儀), 이의방, 이린 등이고, ② 이린이 이의방의 동생이며 ③ 이린은 명문 출신의 문극겸(文克謙)의 사위라는 것이다.(<高麗史> 文克謙列傳도 동일함)

이성계가 이린의 후손이라는 것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제외하면 다른 정사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도 이린의 이야기는 없고 이안사(李安社)부터 찬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사>에서는 이인(李隣)으로 <선원선계(조선 왕실의 족보)>에는 이린(李璘)으로 되어있어 한자(漢字)가 다르다.

나아가 <고려사>에는 “명종 4년(1174) 12월 계해일(癸亥日)에 이린(李隣)을 집주(執奏)로 임명했다.”고 했지만 <고려사>의 다른 부분에는 “(1174년) 이의방이 우연히 선의문(宣義門) 밖으로 나오자 정균(정중부 아들)이 몰래 승려 종참(宗旵) 등을 부추겨 이의방을 뒤따라 가다가 그를 살해하게 한 후, 이의방의 형제(이준의, 이린) 및 그 일당 등을 체포해 모두 죽였다.(”義方偶出宣義門外, 仲夫子筠, 密誘僧宗旵等, 托有求訴, 隨義方後, 伺隙斬之. 分捕俊儀兄弟及其黨高得元·柳允元等, 皆殺之“<高麗史> 卷128, 列傳41, 叛逆2)”라고 하여 앞의 기록과 맞지 않다.

그리고 <고려사>에는 이린의 아들로 주장되는 이양무(李陽茂, ?~1231년)에 대하여 “고종 8년(1221) 4월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최선단(崔先旦)이 과거 급제자 이양무(李陽茂) 등 86인을 선발했다.(<高麗史> 志 國子試)”는 기록이 있는데 이해하기가 어렵다. 여기에 나타난 이양무는 실제로 이린이나 조선왕계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태조실록 총서>에는 분명히 이성계의 선조로 서술이 되어있다. 즉 이양무와 이린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고려사>에는 없고 다만 <태조실록 총서>에만 있다.

왜냐하면 이의방의 죽음으로 전체 혈족들이 몰살되었는데 설령 이양무 혼자 살아 남았다 해도 대역죄인으로 전주에 계속 있으면서 1221년 과거에 급제했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즉 <고려사>에 따르면, 이의방(李義方)과 이린(李隣)이 죽은 것은 1174년이고 이린의 아들로 주장되고 있는 이양무(李陽茂)가 과거에 급제한 것은 1221년인데, 만약 이린이 죽은 시점에서 이양무가 1살이었다고 해도 47세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된다. 만약 이양무가 10세만 되어도 이양무는 63세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된다. 그러면 이양무는 그의 아들인 이안사와 함께 언제 삼척으로 갔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조선의 <태조실록(太祖實錄)>에는 “(이안사는) 처음에 전주(全州)에 있었는데 그때 나이 20여 세로서, 용맹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다. (…) 산성 별감(山城別監)이 객관(客館)에 들어왔을 때 관기(官妓)의 사건으로 인하여 주관(州官)과 틈이 생겼다. 주관(州官)이 안렴사(按廉使)와 함께 의논하여 위에 알리고 군사를 내어 도모하려 하므로, 목조(穆祖)가 이 소식을 듣고 드디어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서 거주하니, 백성들이 자원하여 따라서 이사한 사람이 170여 가(家)나 되었다. (…) 때마침 그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새로 안렴사(按廉使)에 임명되어 또 (삼척으로) 오려고 하니, 목조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배를 타고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 : 함경도 덕원)에 이르러 살았는데, 백성 170여 호(戶)가 또한 따라갔고 (…) 고려(高麗)에서는 목조를 의주 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아 원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 원나라 산길 대왕(散吉大王 : [산지])이 와서 쌍성(雙城)에 둔(屯)치고 있으면서 (…)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에게 원(元)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하니, 목조는 1천여 호(戶)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기 어렵다.

즉 무엇보다도 이안사가 삼척으로 이주한 것은 20세 전후라고 하는데, 그가 지방관과 불화가 심하자 지방관이 군대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힘이 센 호족이었다는 것이 문제다. 더구나 이양무는 대역죄인(이린)의 아들인데도 과거에 급제했다거나 그 아들(이안사)은 전주라는 대도시에서 호족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이안사가 지역을 이주할 때마다 170호씩 이동하는 것도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지도자나 씨족장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농경민들의 행태는 아니다. 이것은 유목민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또한 고려에서 이안사를 의주병마사를 삼았다(<태조실록>)는 내용도 <고려사>에는 없다.

분명한 것은 이린(李隣) ― 이양무(李陽茂) ― 이안사(李安社) 등의 혈연관계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안사 이후의 행적과 후손들의 혈연적 연관성은 고도의 일치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안사가 함경도 덕원(의주) 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먼저 평양(平壤)의 백성들이 목조의 위세(威勢)와 명망(名望)을 듣고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산지(散吉 : 몽골 장군)가 크게 기뻐하여 예절을 갖추어 대우함이 매우 후하였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즐거이 술을 마시었다. (…) ‘이 뒤로부터 서로 잊지 말도록 합시다.’하더니 (…) 명년 을묘(1255)에 산길이 이 사실을 원(元)나라 황제에게 알리니, 원나라에서 이안사를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태조실록 총서(太祖實錄 總序)>)”는 기록은 전혀 신뢰할 수 없다.

인터넷이 있는 시대도 아닌데, 이안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평양(平壤)에서 이름도 없는 이안사를 흠모하여 함경도 쪽으로 따라온다거나 옷치긴 왕가의 실세였던 산지(散吉 : 산지) 대왕이 “연회가 끝나려 할 적에 친히 옥배(玉杯)를 목조(이안사)의 품속에 넣어 주면서 말하기를, ‘이 뒤로부터 서로 잊지 말도록 합시다.’라고 맹세하고(<太祖實錄 總序>)” 다루가치로 임명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산지(散吉) 대왕 이 이안사를 다루가치로 임명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안사는 몽골인이거나 만주족(여진) 가운데 몽골제국에 크게 협조한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고려 입장에서는 고려인 가운데 몽골의 다루가치가 될 정도로 중요 인사라면 고려 조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로 각종 외교 로비에 등장하였을 터인데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즉 이안사는 <고려사>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다루가치는 아무나 임명되는 것이 아니며 고려에서 금방 이주해온 이안사를 당시 옷치긴 왕가의 실세였던 “산지 대왕이 원나라 조정에 천거하여 다루가치가 되게 했다.”는 <태조실록 총서>의 기록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만약 이안사가 애초부터 그 지역에 뿌리를 내렸던 여진계의 몽골 귀족이었다면 충분히 수긍이 가겠지만, 근거도 없는 이주민에게 고위벼슬을 하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성계와 나하추

이성계를 정통 몽골 귀족이라고 의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자춘과 나하추(納哈出)와의 관계 때문이다. 이들 두 사람은 상당히 친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하추는 원나라 초기 공신(功臣)인 무칼리(木華黎)의 후예로, 대대로 요동(遼東)지방의 군사적 책임을 맡았던 집안에서 태어나 원나라 말기에는 심양(瀋陽)을 근거지로 만주지역을 다스렸다. 1362년(공민왕11) 2월 나하추는 쌍성(雙城 : 현재 함남 永興)을 치고자 수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으나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이성계에게 참패하고 달아났다. 이 이야기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제35, 36, 38장)와 <납씨가(納氏歌)>에 잘 나타나 있다.[주17]

고려는 나하추에게 정1품의 벼슬을 내리기도 하였다. 만약 나하추가 고려의 벼슬을 받고 그대로 귀화하면서 나주(羅州) 나(羅)씨의 성을 받았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조를 건설했다면, 이성계와 같은 결과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하추는 원나라가 동북으로 쫓겨 갈 당시 성립된 북원(北元 : 기황후의 아들이 초대 황제임)을 도와 요동지역과 중원 회복을 위해 투쟁하다가 주원장의 고립정책으로 결국 명나라에 투항하였다. 이후 만주 지역의 원나라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북원은 멸망의 길을 걸었다.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에 따르면, “이성계가 (나하추의) 말을 쫓아 추격하니 ‘이보게 이 만호, 두 장수끼리 어찌 이리 핍박하는 것이오?’ (…) 후에 나하추가 사람을 통해 왕에게 말을 바치고 (…) 나하추가 말하기를 ‘이자춘이 지난 날 ’나에게는 제주 있는 아들이 있다더니 과연 거짓말이 아니었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나하추와 이자춘이 매우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주18]

이성계와 이자춘이 원나라가 망해가는 걸 보면서 고려에 투항했고, 이성계가 고려 귀족화 되는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 했다면, 자신의 출신을 더욱 은폐해야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결국 친명(親明)·반원(反元)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나라는 이미 기울었고 명나라는 중원을 통일한 신흥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몽골 귀족이 아니라 전주 이씨(李氏)로 뿌리를 내리게 되면, 더욱 원나라와는 철저히 절교(絶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고려에는 정치적으로 복잡한 보수 세력과 신진 세력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었다. 친원 - 친명, 대토지 소유 - 중소지주, 성리학 - 비성리학 등으로 각 분야별로 대치하던 정치세력의 이합집산도 심화되고 있었다. 이 틈새를 뒤집고 들어간 것이 바로 정도전(鄭道傳)이었다.

이성계는 원명 교체기에 자신의 군벌 모태인 원나라로부터 결별하고 독립하면서 재빨리 고려 국내의 친원파(親元派)를 적으로 돌려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신흥 명나라와 손을 잡아, 고려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안정적으로 승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대외관계 노선을 선택했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하자, 바로 그 이듬 해 고려도 신속하게 원나라와의 관계를 정리하였다. 즉 고려는 원나라 연호 사용을 정지하고 원나라를 북원(北元)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1369).[주19] 북원은 북상하는 명나라의 15만 대군을 섬멸한 후(1372), 고려에 대해 합동 군사작전으로 중원(中原)을 회복하자는 요청을 여러 차례 보내왔으나 끝내 고려는 침묵하였다.[주20] 물론 당시 국제정세로 보아, 고려의 선택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1384년 이후에는 명나라가 북원의 사신이 다니는 길을 봉쇄해버렸기 때문에 통교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원나라 황실은 긴 세월의 은혜를 저버리고 두터웠던 ‘구생(舅甥 : 장인과 사위)의 은혜’를 배반한 고려에 대해서 크게 실망을 하였다.

윤은숙 교수는 “결국 몽ㆍ원 제국이 죽어 넘어진 시신위에서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 2대 제국이 태어나는데, 하나는 1368년의 주원장의 명나라고 다른 하나는 1392년의 이성계의 조선국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주21] 따라서 고려계(?) 몽골군벌 가문 출신인 이성계가 개국한 조선조는, 친명사대(親明事大)에 강하게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고 이것은 조선조를 통틀어 나타나게 된다.

정도전과 조선이라는 국호

조선이라는 명칭도 그래서 정한 것이다. 즉 정도전은 조선의 건국 이념을 정리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이성계의 “조선은 기자조선의 계승자라는 의미로 국호를 조선으로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600년 동안 조선을 기자를 계승한 나라로, 중화의 충실한 외변(外邊)으로 자처했다. <조선경국전>에는 “우리나라는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 (고구려·백제·신라·고려 등은) 모두 한 지방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 침탈만 일삼았으니, 비록 그 국호가 있다 해도 쓸 것이 못 된다. 오직 기자만은 주나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 … (명나라 천자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권고하시니) … 이는 아마도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을 전하여 권한 것이니, 그 이름이 이미 정당하고 말은 순하다.” 라고 썼다.

<朝鮮經國典>「國號

조선은 한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국호가 아니라, 중화(中華)의 신하인 기자를 기리기 위한 국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명적(親明的) · 친한족적(親漢族的) · 모화적(慕華的)이었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왜곡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성리학과 사대주의로 민족의 정체성을 잃다

한국에서는 고려와 몽골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더욱 부정적이다. 원나라는 사실상 세계의 지배자였고 고려인들은 원나라의 정치에 직접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일방적이었고 종속의 정도는 더 심했으며 조선인들이 명나라의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었다.

조선은 중국에서도 사라진 성리학(性理學)을 국학으로 하여 이데올로기(ideology)로 삼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의례(儀禮)의 근간으로 하여 통치철학의 기본으로 건국한 나라였다. 명나라 성화(成化) 연간에 편찬된, 주자의 사상을 집대성한 구준(丘濬)의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전 8권 : 1465)을 적극 수용하여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였다.

<주자가례>는 <문공가례(文公家禮)>라고도 하는데 후인들이 주자의 이름을 빌어 편찬한 책이라는 설도 있다. 고려 말 주자학과 함께 한반도에 전래되었다. 명(明)나라 성화(成化)연간에 구준(丘濬)이 <주자가례>를 기초로 하여 의절고증(儀節考證) 등을 추가하여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 8권을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학문의 스승으로 각인된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등은 비생산적인 <주자가례>를 더욱 발전시켜 <성학십도(聖學十圖)>,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성학집요(聖學輯要)>, <가례집람(家禮輯覽)>,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등을 저술하여 이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조선은 성리학(주자학)을 국가 정교(政敎)의 기본강령으로 채택하여, 주자학에서 말하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는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하는 국가적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주자학은 송대(宋代)의 시대의 산물이었고, 송나라 때 이루어진 <주자가례>가 당시 조선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많은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야기시켰으며 그것이 결국 조선으로 하여금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사회가 정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스스로 중화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하더니 급기야 “중국(명)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요, 오랑캐(청)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의 원수입니다. (…) 차라리 나라가 없어질지언정 (중국과의) 의리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윤집 「척화론(斥和論)」]”라고 하기도 하고 “오로지 우리 동방(東方)은 기자(箕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肅宗實錄> 7-1-3). (…)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오시어 홍범(洪範)의 도로써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夷]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송시열의 말 : <肅宗實錄> 9-2-12).”라고 하는 등 역사적 이성(理性)을 상실해갔다.

즉 조선의 대표적 충신(忠臣)이라는 자가 “중국은 부모(父母)고 우리 나라가 없어져도 중국과의 의리를 지켜야한다.”고 하지를 않나, 한국의 유학의 성인급(聖人級)으로 분류된 동방거유(東方巨儒)라는 자는 “한국은 중국에 의해서 오랑캐의 티를 벗고 새끼 중국이 되었으니 그 은혜가 만대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이 사람들이 민족의식(民族意識)이나 역사적 이성이 없어 생긴 결과가 아니라 성리학이나 중화사상으로 무장하면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주자학)이 위험한 것은 성리학을 제외한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이단(異端)과 사교(邪敎)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조선은 사회경제적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고 인문과학적 사회에서 안주하는 환경을 만듬으로써 미래의 비전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서유럽은 근대 이성으로 무장하고 부국강병의 길로 가고 있는데 조선은 시대를 역행하여 결국은 식민지의 길을 갔다.

이와 같이 조선은 철저한 사대 모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원류와는 단절을 도모하였고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조선의 국왕이 된 이성계 자신의 정치적 실체를 은폐하려는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몽골 군벌이었던 이성계가 조선 국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당시 고려인들이 몽골과 고려와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고 몽골군벌이 조선의 왕이 되는데에 대한 저항감이 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당시 ‘사실상 유일한 독립국’ 고려와 세계의 지배자인 원나라의 친밀한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성계가 몽골 군벌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이해가 되지만, 이성계의 무력을 이용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던 세력들이 민족의 원류인 북방민들을 지나치게 오랑캐로 천시하는 정치, 사회, 문화적 환경을 만든 것이 문제이다. 이것이 한국 역사 전체를 왜곡하고 오늘날 민족의 정체성의 혼돈을 초래한 원인이다.

출처: 프레시안 - 한국사 왜곡의 주역, 이성계와 정도전 (201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