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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몽고의 관계에 대한 왜곡

당시의 몽골대제국은 군대가 갈 수 있는 곳이면 모두 정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지배하고 있었던 지역에서 유독 고려(高麗)만이 독립국으로 남아있었다. 원나라의 남송 정벌 과정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남아있다. 금나라와 남송을 멸망시킬 정도의 나라가 고려가 강성해서 멸망시키지 않았다고 착각하면 곤란한 일이다.

역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드라마와는 반대로 세계를 무력으로 짓밟은 원나라가 고려와의 관계 속에서는 이상하리만큼 고려에 우호적이었고 관대하였다. 몽골이 전쟁을 거쳐 정복한 나라를 부마국(駙馬國)으로 삼은 경우는 없다. 대부분 몽골의 통치자들은 사신을 죽이거나 자기들에게 대항한 군주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복하는데 고려처럼 부마국으로 삼고 국체(國體)를 유지시켜준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금나라 마지막 황제인 9대 애종은 자살했고, 10대 완안승린은 몽골군에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1234). 남송의 마지막 황제 소제는 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1279).

몽골학자 B.하과(Лхагва)의 연구에 따르면, 원나라 당시 대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국가는 대체로 세 가지의 형태로 분류된다. 첫째, 무력으로 점령해 영토나 권력 전체를 자신의 아래에 두는 형태의 통치 방식이다. 금나라, 위구르, 콰레즘, 페르시아의 일부분, 남송이 이 형태에 해당한다.

둘째, 몽골의 일부 대칸과 그들의 가계 소유지에서 기원해 그 통치 구역 내에 정권을 수립하는 형태의 통치 방식이다. 어거데이 칸국, 차가타이칸국, 일칸국이 이에 해당한다. 이 형태는 해당 칸국의 지도자들에게 국내 정치를 총괄하는 메커니즘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위에 대몽골제국이나 몽골 대칸들의 지배 체계를 입혀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셋째, 그 나라의 영토나 독립된 권력을 그대로 남기고 자신을 대변하는 기구나 사신 또는 그 나라의 왕이나 칸들을 통해 지배하는 통치 방식이다. 고려는 위의 형태 중 세 번째에 속한다. 이 경우에는 인질을 바치고 군을 도우며 양식을 운반하고 역을 설치하며 백성들을 제공하기도 하고 원나라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현지국을 감시하도록 하는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두게 된다.그런데 고려의 경우에는 부마국이 되면서 다루가치가 별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B.하과(Б.Лхагва), <13~14세기 몽골-한국의 관계와 전통으로부터>, 1996(서울)을 박원길 S.촐몬 <한국·몽골 교류사 연구> (이매진, 2013)에서 재인용.

5000년 기나긴 역사에서, 한국에 대규모의 식량을 제공한 나라는 미국을 제외하면, 대몽골 제국밖에 없었다. <고려사>에는 원나라 황제가 많은 거금(巨金)을 고려 왕실에 보낸 내용이 무수히 실려 있다. 그 같은 큰 규모의 대외 원조(援助) 뿐만 아니라, 고려왕실이 원나라 황실과 가족관계였던 관계로 충렬왕(1274~1308)의 탄신일에 원나라 태후가 40여 마리의 양을 보내기도 하고, 고려는 국내에 가뭄이 들면 원나라 중서성에 곡식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고려 원종(1259~1274) 15년 원나라는 쌀 2만 석을 고려에 보내주었고 충렬왕 17년 원나라는 강남미(江南米) 10만 석을 무려 47척의 배로 고려에 보내주기도 했다. 한반도의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에서 엄청난 쌀이 공수되었다. 물론 일본 정벌의 과정에서 많은 무리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한국 역사책들은 몽골에 의해 고려가 받은 많은 원조나 혜택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庚寅元遣中書舍人愛阿赤來先是爲征日本運江南米十萬石在江華島今遼瀋告飢帝詔以五萬石賑之. (<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

<원사(元史)>에는 세조(世祖) 쿠빌라이칸이 서거한 뒤 그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오직 몽골인과 고려인만이 출입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이 기록은 그대로 <고려사>에도 나타난다.

현재 한국에서는 대몽골 시대에 몽골과 협력한 일에 대해서 매도하는 이상한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지나치게 팽배한 결과로 보인다. 명나라와 협력한 일은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 되는데 원나라와 협력한 일에 대해서는 '오랑캐의 앞잡이'쯤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한국인들의 소중화의 병이 깊은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신의 보고서에는 몽골 병사들이 신흥 명나라 주원장의 공세에 밀려 요동반도에서 전쟁을 치르면서도 현지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동족'이라 하여 살상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조선 세종 때에도 몽골은 조선에 사신을 파견, '형제국이니 힘을 합쳐 명나라를 공격하자'는 국서를 전달했다. 일제 침략기엔 일부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이 몽골을 넘나들며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참고: 한국-몽골 국가연합론 세미나)

이상을 보면 한국과 몽골의 관계에 있어서 국가적 배신을 한 나라는 고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국제 관계를 단순히 개인적 의리의 차원에서만 봐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가 망한 후 한반도의 지배층들이 보인 행태는 철저히 숭명반청(崇明反淸)으로 지속되었던 것과 대조된다. 이것이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파탄으로 몰고 간 대표적인 사건의 일부이다. 당시 한반도의 지배자들이 청나라와 보다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만주인(滿洲人)들이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 입관(入關)한 후 텅 빈 만주 대륙을 청나라와 협조하여 지켰더라면 오늘날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같은 역사적 시련은 없었을 것이다. 출처: 기황후,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2 - 프레시안 (2013.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