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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와의 결혼동맹에 대한 오해

한국에서는 오랜 세월을 이상하게 고려와 원나라의 결혼동맹에 대해 폄하(貶下)하는 것이 무슨 지성(知性)의 조건처럼 생각되어 왔다. 또 마치 원나라가 고려왕에게 강압적으로 결혼을 강요하였고(한국의 대부분의 관련 자료들의 논조가 이렇다.), 그 결혼동맹이 원나라의 식민지가 되는 지름길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잘못된 역사교육의 탓이다. 결혼을 애걸한 것은 애초에 고려 왕실이었기 때문이다.

원나라시대 20만 명 넘는 몽골 여성이 고려로 이주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몽골로 간 여인들의 이야기만 알고 있는데 몽골의 전문가인 바트술해 (몽골 뭉크하누대 학장) 교수에 따르면, 원나라 당시 무려 20만 명 넘는 몽골 여성이 원나라에서 한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두 나라는 서로를 '신부신랑 나라' 또는 '어머니 나라'로 부르게 됐다. (주1)

1990년 한국과 몽골이 수교한 이후 직항로가 열려 4만여 명의 몽골인이 한국에 살고 있다. 한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몽골인만 2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몽골 전체 인구(약 300만 명)의 10% 가까운 몽골인이 한국 생활을 체험했다는 말이다. 학문적으로 몽골과 고려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해 온 최기호 울란바타르 대학 총장(전 연세대 교수)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몽골은 언어·인류학 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했다.

고려 원종 원나라와 결혼동맹을 청원하다

그동안 잘못된 역사교육 탓으로 고려와 원나라의 결혼동맹을 비하해온 데에는 '몽골은 오랑캐'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이른바 '새끼 중국인(小中華)' 근성으로 중국인에 대해서는 항상 존중하면서, (자기가 오랑캐이면서) 주변 민족을 비하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유학적(儒學的) 지성(知性)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원나라와 고려의 결혼동맹을 처음 추진한 것은 고려 원종(1219~1274)이다. 원종은 오랫동안 무신정권에 시달린 사람으로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국내적으로는 무신 관련 잔존 세력들을 통제해야 했고 땅에 떨어진 국왕의 위상을 높여야 했다. 또 대외적으로는 원나라의 간섭을 최소화하여 국내 정치의 독립적 기반을 쌓아야 했다. 최 씨 무신 정권의 시대착오적인 이른바 '대몽 항쟁'으로 30여 년에 걸친 전란이 발생하여 국토가 황폐해지고 국가 경제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러 이를 복구하는데 원나라의 도움도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원종은 1270년 대도(大都 : 베이징)로 가서 원세조(쿠빌라이칸)를 만나 결혼동맹을 요청하였다. 당시 원종은 "우리나라가 귀국에 대해 청혼을 하는 것은 영원히 좋은 인연을 맺고자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나의 분수에 넘치는 일을 청하는 듯하여, 오랫동안 감히 청할 수가 없었지만 이제 모든 것들이 (귀국이) 원하는 대로 해드렸고 마침내 세자 또한 이 자리에 와 있으니 바라건대 황제의 따님(공주)을 세자에게 결혼을 허락하여 결혼의 예식을 이루게 되면, 우리나라는 번왕(藩王)의 직분을 다할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甲戌王上書都堂請婚曰: "夫小邦請婚大朝是爲永好之緣然恐僭越久不陳請今旣悉從所欲而世子適會來覲伏望許降公主於世子克成合巹之禮則小邦萬世永倚供職惟謹."(<高麗史> 26卷 元宗 11年)

이에 대해서 원 세조는 "너무 서두르지 말고 일단 국내 정치부터 안정시키라."고 권고하였다.(<고려사> 권 28 충렬왕 4년 7월) 그러나 다음 해인 1271년 원종이 원나라에 재차 결혼을 요구하였고 원 세조는 이를 수락하였지만, 공주가 아직 어려서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고 결국 3년 후 고려 태자(후에 충렬왕)와 원세조의 따님의 세기의 결혼식이 이루어졌다. <고려사>는 태자와 공주가 한 수레에 타고 개경에 도착하니 백성들은 "백년의 난을 겪고 드디어 태평의 시대가 왔다."고 환호하였고 태자는 새 왕(충렬왕)으로 등극하였다고 전하고 있다.(<고려사>권89「齊國大長公主傳」)

그러나 이렇게 고려 왕실은 필요에 따라 결혼동맹을 추진하였지만, 후에는 오히려 고려가 미적거리면서 혼인 동맹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어떻게 일가(一家)라면서 그럴 수가 있나?"라며 원 세조는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결국 당시 고려가 결혼동맹을 추진한 것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고려는 애당초 다루가치를 성가시게 생각했고 무신정권의 잔재로부터 왕권을 보호 내지는 강화하면서 원나라의 내정 간섭도 줄여야 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결혼동맹이었다.

황제와 혈통을 함께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여자가 귀하여 근친상간의 폐해가 자주 나타나는 유목민들의 경우 혈연을 맺는다는 것은 매우 심각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황실이 아무하고나 통혼(通婚)할 수도 없다. 그래서 원나라 황실은 혈통적으로 가장 가까운 고려인을 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일을 특히 원세조(쿠빌라이칸)가 적극 추진하였다. 고려를 특히 사랑한 원세조는 몽골인과 한국인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하기 위해 적극적인 결혼정책을 폈다. 원세조는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을 기존의 약혼을 파기하면서까지 충렬왕에게 시집보내면서 "몽골법에 결혼을 하여 일가가 되는 것은 진실로 교친하는 것이라 했으니 짐이 어찌 허락하지 아니하리오."라고 말하고 있다.

"若請婚則聖旨云, 韃旦法, 通媒合族, 眞實交親, 敢不許之"(<高麗史> 26卷-「世家26-元宗2」)

여기서 유념할 것은 충렬왕(1236∼1308)은 1275년 등극하였는데 이 당시 나이가 39세로 오늘날로 치면 중년 또는 장년의 나이였다. 그리고 이 나이에 16세의 몽골 황녀와 결혼하였는데 이것은 당시로 봐도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원세조(쿠빌라이 칸)가 아꼈던 막내 따님을 늙은 신랑에게 보낼 만큼 절박한 사정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원 세조가 충렬왕을 황제의 사위로 삼았다는 것은 그의 남다른 고려 사랑을 보여준다. 즉 충렬왕의 경우와 같이 황제의 따님(원성공주)을 다른 나라에 시집을 보내는 일은 원나라에서는 이전까지 없었던 일이다. 더욱이 당시 고려왕들은 대개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 같은 결혼은 고려로 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부마국의 지위: 원나라와의 결혼동맹의 의미

한국에서는 고려와 원나라 황가의 결혼을 단지 정략적이거나 식민 속국을 위한 전초단계라고 가르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잘못이다. 칭기스칸이 처음으로 혼인관계를 맺은 것은 옹기라드(Onggirad)와 이키레스였으며 이후에 옹구드(Onggud), 오이라드 등도 있었다. 이들 부족들은 칭기스칸이 몽골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지원을 보냈고 스스로 원에 귀부(歸附)하였던 세력들이다.

보르지기다이 바타르<팍스몽골리카와 고려>(혜안, 2009) 72∼79쪽 참고.

고려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고려는 남송과 더불어 원나라를 가장 괴롭힌 국가에 속한다. 고려는 무려 30여 년간을 원나라에 허언(虛言)과 사기(詐欺)를 일삼았다(다른 장에서 상술함). 원나라는 원래 사해평등주의에 입각하여 각 국가의 종교와 문화를 보호해주고 철저히 능력에 따라 등용한 나라지만, 남송인들에게는 내우 각박하였다. 그런데 고려에 대해서는 마치 형제관계를 맺기 위해 인내하고 또 인내하였다.(이 '역사적 미스터리'를 제대로 밝혀내는 것이 이번 연재의 목적이기도 하다)

원나라와 고려의 결혼동맹은 이전의 종주국 - 식민국(번국)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행태를 띠게 된다. 원나라의 부마(쿠레겐)가 된다는 것은 속국에서 원나라의 친족(親族) 관계로 전환하는 것으로 그 지위가 매우 높았고 기타의 귀족과도 비교될 수가 없었다. <원사(元史)>에 따르면, 원래 "원나라의 특별한 개국공신이 아니면 혼인관계를 맺을 수 없고 일단 부마가 되면, 제왕(諸王)의 대우를 받는다."라고 규정되어있었다.

元室之制 非勳臣 世族及封國之君 則莫得尙主 是以世聯戚畹者 親視諸王 (<元史> 卷108「諸王表」)

이것은 중국의 고대 왕실들이 정략적으로 맺는 혼인관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친족 관계를 목적으로 하는 결혼을 의미하는 것이다.

1269년(원종 10년) 11월에 원나라 병부시랑 흑적이 사신으로 왔을 때, 원종이 연회를 베풀고 상좌에 앉기를 청하니, 흑적은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왕태자는 황제의 따님과 혼사가 허락되었기 때문에 저희는 황제의 신하요, 왕은 부마 대왕의 아버지이니 어찌 감히 대등한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한 것으로 봐도 결혼을 약속한 이후 고려의 지위 변화를 예측할 수 있다.

癸亥王宴黑的等使坐上座黑的等讓曰:"今王太子已許尙帝女我等帝之臣也王乃帝駙馬大王之父也何敢抗禮王西向我等北面王南面我等東面." 王辭曰: "天子之使豈可下坐?" 固辭東西相對. <高麗史> 26卷-世家26-元宗2-10

원나라의 고려사랑에 대한 미스터리

이런 점에서 볼 때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미스터리에 가깝다. 원나라가 고려에 대해 왜 이런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당시의 원나라 지배층이 분명히 밝혀주지를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알기는 어렵지만, 단순히 원세조(쿠빌라이칸)의 고려에 대한 사랑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고 어떤 민족적 동질성(同質性)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만 이해할 수가 있다.

이런 점은 몽골 황제의 명령으로 편찬한 <몽골비사>에서 말하는 칭기스칸의 시조모(국모)인 알랑고아가 고주몽(코릴라르타이 메르겐 : 코리족의 명궁)의 따님으로 나타난 것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1(해냄, 2006)> 6. 아리수를 아십니까? 및 <대쥬신을 찾아서 2(해냄, 2006)> 19. 몽골, 또 다른 한국 - <원사(元史)>는 또 하나의 <고려사> 참고.

이 알랑고아 신화는 고구려의 유화부인 신화의 몽골 버전(Mongol version)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몽골이라는 말이 맥골(맥고구려)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특이한 사실은 칭기스칸이 금나라 황제 알탄 칸의 청으로 타타르를 정벌한 뒤 받은 작호가 '자오드 까오리' 즉, 고려왕(高麗王) 또는 고려후(高麗侯)이다.

한국의 관련 전문가들에 따르면, 몽골 할흐골솜 설화엔 '고리(코리)족이 동남쪽으로 이동해 갔다'고 하고 몽골 전문가들은 '코리족 일파인 솔롱고스가 남쪽으로 가 고구려 칸이 됐다.'고 한다(이것이 몽골에서는 정설로 통한다). 즉 '까오리 또는 코리(Korea)'라는 한 뿌리에서 한반도에는 부여·고구려가, 몽골 대초원에서는 몽골족이 나왔다는 얘기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 인근 부리야트족의 구전에 따르면 이 일대는 고리국(코리국) 발원지이며, 이 부족 일파가 옛날 동쪽으로 가 부여·고구려의 뿌리가 됐다고 한다(몽골족의 기원에 관한 종합적 검토는 다른 장에서 상술할 것이다). 몽골의 고려에 대한 태도는 마치 청태종이 조선 인조(仁祖)의 온갖 무례함을 다 받아주면서 '부모의 나라'라고 하면서 관대하게 대한 것과도 일맥상통하다.

원 황실과 친족 관계가 된 고려왕은 원의 다른 제왕들처럼 원나라의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도 있었고, 원황실로부터 많은 보상과 지원을 받았다. 또 고려 국왕에게는 역참을 제공하여 고려국왕이 원나라 수도를 갈 때는 신속하게 갈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보르지기다이 바타르<팍스몽골리카와 고려>(혜안, 2009) 73∼78쪽 참고.

출처: 프레시안 (201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