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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원나라(몽골)와의 혼인관계

고려의 여자와 결혼하여야 명가(名家)

그동안 몽골에 대한 연구자들의 견해들을 종합해 보면, 몽골인들이 유난히도 고려인들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당시 세계의 주인이었던 원나라의 지배층들은 세계의 대부분의 여성들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와 결혼동맹을 추진한 것은 일반적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고려여인들이 상대적으로 미인(미인)이라서 그럴 것이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몽골 서부 지역은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터키 등에 이르는 지역으로 동서양의 피가 어우러져 세계적인 미인(美人)의 나라들이다.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미인의 모습에 대해 강요를 받지 않는 한, 자기와 닮은 사람들 가운데서 미인을 찾는 것이 보편적이다. 따라서 몽골인들이 고려인들을 좋아했다는 것은 몽골과 고려인과의 어떤 동질성(同質性)을 떠나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원나라 때에는 몽골군들은 포로로 잡은 고려 여인들과 결혼하는 것은 다반사이며 사신은 물론 다루가치, 둔전병에 이르기까지 고려 여자를 아내로 삼으려는 풍조가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당시 원나라의 벼슬아치들은 고려여인들과 결혼하고 거실에는 고려청자, 나전칠기를 장식하고 고려먹, 고려 종이를 사용하며 고려 화문석을 깔고 사는 것이 유행이었고 고려인삼(高麗人蔘)은 진시황이 찾는 불사약(不死藥)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7』(한길사, 2005)

그래서 <경신외사(庚申外史)>에서도 "(원나라) 대신과 귀인들은 고려 여인을 얻은 후에라야 명가(名家)라고 불렸다 … 여러 곳에 늘린 의복과 신발, 모자 및 기물(器物)이 모두 고려의 모습을 따랐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정이 "지금 고려의 부녀가 후비(后妃)의 반열에 있는 이도 있고 왕후(王侯)의 귀인(貴人)으로 된 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경대신(公卿大臣)이 고려의 외손자 출신이 많습니다. 이들은 본국의 왕족과 문벌, 부호의 집안에서 특별히 조지(詔旨)를 받들고 온 여인, 혹은 자원해 온 여인, 또는 중매를 통해 온 여인들입니다."라고 하였다.

"今高麗婦女,在后妃之列,配王侯之貴,而公卿大臣,多出於高麗外甥者. 此其本國王族及閥閱豪富之家,特蒙詔旨,或情願自來,且有媒聘之禮焉"(<高麗史>列傳「李穀傳」)

혜종과 기황후 사이에 태어난 아요르-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는 북원(北元)의 1대 황제인 소종(昭宗)인데, 중요한 점은 소종의 황후도 권황후(权皇后)로 고려인(高丽人)이었고 1370년에 황후로 책립(册立)되었다는 것이다.

기황후에 가려진 또 한 사람의 황후

원나라 황실에 시집간 비빈급 고려 여인들 가운데 기황후에 가려진 중요한 인물이 또 있다. 바로 인종(仁宗:Ayur-Baribad, 1285~1320)의 후비였던 바얀-코토크(伯顔忽篤, Bayan-Khutug)다. 바얀-코토크는 충선왕의 비(妃)인 순비順妃 허씨(許氏)의 따님으로 충선왕의 비인 순비(順妃)가 충선왕과 결혼하기 이전에 낳은 딸이다. 즉 바얀 코토크의 계부(繼父)가 충선왕이다. 원래 순비 허씨(?∼1335)는 과부(寡婦)였다가 충선왕의 눈에 띄어 충선왕의 비(妃)가 되어 순비(順妃)로 책봉되었다(1308). 순비 허씨는 허공의 딸로 처음엔 평안공 왕현에게 시집가서 3남 4녀를 낳았는데 왕현이 죽은 후 태자인 충선왕에게 개가(1308)하였고, 충선왕이 등극하자 순비로 책봉되었다. 충선왕과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충선왕은 원래 원 세조의 손녀인 부타시리(계국대장공주)와 결혼을 했지만 부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충선왕도 충렬왕처럼 몽골 공주(부타시리 왕비)를 멀리하고 여러 후궁들을 거느렸는데 그 가운데서 조비를 가장 총애하였다. 그러나 조비의 어머니가 부타시리 왕비를 저주한다는 등의 소문이 돌아서 부타시리 왕비는 조인규와 그의 아내, 가족들을 잡아 가두고, 몽골에도 이 사실을 알렸고 결국 이 사건과 지나친 개혁 정치로 인하여 충선왕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7개월 만에 폐위당하고 충렬왕이 복위되었다. 그 후에도 충선왕은 고려 여인들을 사랑하여 주로 숙비(淑妃)와 순비(順妃)를 총애하였다.

인종의 후비인 바얀-코토크는 이 순비의 따님인데 후비로 임명되자, 순비에게 많은 고급 의상과 선물을 보내어 충선왕을 사로잡도록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충선왕이 숙비를 멀리하고 자기의 어머니인 순비를 더 사랑하게 하도록 많은 힘을 쓴 것이다. 순비의 연적(戀敵)은 숙비(淑妃)였는데, 이런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충선왕이 순비를 더 사랑해주지 않자, 충선왕을 티베트로 귀양보낼 정도로 숨은 실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박원길 <배반의 땅, 서약의 호수> -21세기 한국에 몽골은 무엇인가(민속원, 2008) 31쪽 참고.
고려인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사람들

숙비(淑妃)는 원래 충선왕의 아버지인 충렬왕의 부인이었다. 원나라나 고려 후기에서는 이런 식으로 아버지의 후궁을 다시 아내로 취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흉노(匈奴)의 전통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을 농경민의 시각에서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도 당태종(唐太宗)과 당고종의 비(妃)였고 당 현종은 자기 며느리인 양귀비(楊貴妃)와 결혼하였다. 이것도 당 황실이 유목민(선비)의 후예이기 때문에 나타난 일이다. 측천무후는 637년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의 후궁으로 입궁하였고 당태종이 죽자 무후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하였다가 고종(高宗, 재위 649~683)의 후궁으로 다시 입궁하였고, 황후를 내쫓고 황후가 되었다. 고구려나 부여의 결혼 풍습가운데 형사취수혼(兄死娶嫂)도 농경민에게는 악행 중의 악행이지만 유목민들에게는 일반적인 유풍이었다.

세 황제의 사랑을 받은 고려인 황후 다마시리 황후

태정제(泰定帝:Yesün-Temür, 1293~1328 : 진종, 재위 5년)의 황후 다마시리(達麻實里, Damashiri)는 고려인이었다.

태정제는 진종(眞宗)이라는 묘호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태정제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1328년 태정제의 아들 천순제(天順帝)가 폐위됨으로 인해 시호가 추탈되었다.

다마시리는 고려시대의 명문가의 후예로 할아버지인 김주정(金周鼎, 1228~1290)은 과거에 장원 급제한 명재상이었고, 아버지인 김심(金深, 1262~1338) 역시 3번이나 정승에 임명될 정도의 문벌귀족이었다. 1323년 태정제는 쿠데타를 일으켜 영종(英宗)을 살해하고 대칸에 즉위한 인물이다. 몽골 전문가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다마시리 황후는 세 황제를 모신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만큼 권력이 강했다는 의미도 된다.

<고려사>에는 "(태정)황제는 화평군(化平君) 김심(金深)의 딸인 다마시리를 황후로 삼았다. 이전에 그녀는 인종의 편비(偏妃)였다."고 한다.

<고려사> 충숙왕 1328년 4월조:(泰定)帝封我化平君金深女達麻實里爲皇后,先是深女爲仁宗皇帝偏妃

즉 다마시리 황후는 인종의 편비이자 태정제의 황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의 기록을 보면, "(1309년 3월) 대사헌(大司憲) 조서(趙瑞)가 원나라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참리(參理) 김심(金深)을 고려도원수(高麗都元帥)로 임명하고 조서를 부원수로 임명하였다. 당시 김심의 딸이 황제에게 입시(入侍)하여 총애를 받았으며, 그뿐만 아니라 조서의 딸도 뽑혀 원나라의 총신에게 시집갔으므로 고려 조정은 이와 같이 임명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高麗史節要> :"(1309년 3월)大司憲趙瑞還自元,帝以參理金深爲高麗都元帥,瑞爲副元帥,時,深女入侍於帝得幸,瑞女亦被選適元寵臣故拜". <고려사> 에는 "(1309년, 3월)戊申,大司憲趙瑞還自元,帝以叅理金深爲高麗都元帥,瑞爲副元帥"처럼 김심과 조서의 관작임명에 대한 기록만 수록되어 있다. 박원길, 앞의 책 재인용.

이 기록은 다마시리가 이미 1309년 무종(武宗:Khaisan, 재위1307~ 1311)의 비빈으로 책봉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다마시리는 무종 ― 인종 ― 태정제의 비빈으로 세 사람의 원나라 황제를 남편으로 둔 매우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세계의 주인 세 사람을 남편으로 두었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주목할만한 사실은 태정제의 병이 위독한 상태에서 다마시리가 황후로 책봉되었고, 당시 조정의 최고 실력자가 엘테무르(燕鐵木兒)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마시리는 엘테무르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사람일 것이다. 엘테무르는 무종(武宗)의 숙위(宿衛)로 10여 년을 복무하면서 총애를 받았고, 태정제 사후 무력으로 무종의 아들인 문종을 옹립했다.

그리고 다마시리는 원나라의 정사(政事)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고려 조정에도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황후보다도 더 큰 영향을 행사했을 가능성도 있고 <드라마>로써는 더 재미있는 소재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원나라 황실에서 고려 출신의 황후급의 인물들 가운데 주요한 세 분의 일대기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기황후(얼제이투-코톡토) 이전에도 바얀-코토크(伯顔忽篤, Bayan-Khutug)나 다마시리(達麻實里, Damashiri-Khatun)와 같은 인물들이 원나라 황실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기황후의 등장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 황실에서 고려인에 대한 유별난 정서를 가지게 된 것은 멀리 칭기즈칸과 쿨란 공주, 메르키드와 고려를 동일시하는 역사적 전통과도 깊이 연관되어있다. 당시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겠지만 그 동안 필자의 연구들을 토대로 보면 몽골은 분명히 고려를 '형제의 나라'로 인식할만한 충분한 근거들이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이 몽골과 한국이 형제라는 의식을 가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출처: 프레시안 - MBC 기황후, 30부까지 사실이 없다 (2014.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