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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공녀(貢女)에 대한 오해

일반적으로 공녀라고 하면 원나라가 자행한 매우 야만적인 행위로 알고 있으나 몽골이 중원에서 쫒겨난 후 명나라의 세번째 황제가 된 성조(영락제: 1360~1424)또한 조선에 공녀를 요구하였으며 성조가 죽으면서 순장(殉葬)한 13명의 비빈 가운데에도 조선여인이 있었다.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등 기록에 나타난 원나라로 보내진 공녀의 수는 몽고의 영향하에 있었던 82년(1274~1356년)동안 713명으로 800명 미만이었다. 특히 초기인 1274년부터 1276년까지 3년동안 전체의 91%가 공녀로 보내졌으며 이후에는 1년에 1~2명 꼴이었고 드라마 기황후 시대인 충혜왕 시기에는 공녀가 거의 없는 수준으로 그 숫자도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다.

공녀로 보내진 여인들은 대부분 짝이 없는 과부나 처녀였으며 상당수의 고려 처녀들은 원나라 귀족 집으로 들어갔고 과부들은 일반 평민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기자오(奇子敖)의 딸(기황후)은 원황제 순제(順帝)의 황후가 되어 태자를 낳아 황태후가 되었고, 김심(金深)의 딸은 원황제 무종(武宗)의 총애를 받았고, 조서(趙瑞)의 딸은 총신의 아내가 되었다.

공녀의 수치가 적다고 해서 이들의 행위가 나쁘지 않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치 일제강점기 정신대식으로 끌려간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되며 일부에서처럼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원나라와 공녀에 대한 역사왜곡은 조선후기 광해군이 실각한 후에 절정을 이루고 있는데, 인조(仁祖) 이후 정권의 실세들이 자기들의 실정(失政)을 은폐하기 위해 시대착오적인 각종 역사 왜곡을 자행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이들은 한족(漢族)에게 있어서 조선 또한 동이(東夷)라는 오랑캐였음에도불구하고 중국과 조선을 제외하면 모두 오랑캐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공녀 기록

출처: 프레시안(2013.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