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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예를 통해 가능한 통일의 과정

남과 북의 민심통일

통일의 구심력을 키우는 방법의 핵심은 남북한의 민심을 연결하는 것이다. 남북이 가까워지려하고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 즉 상호의존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남북이 가까워져야 하는데, 정치적으로 먼저 가까워지기는 어렵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독일의 사례다.

동서독이 통일되는 과정에서 국제정치적인 요인도 작용했지만 그건 나중에 일어 난 일이었다. 그보다는 민족 내부적 요인이 먼저, 그리고 더 크게 작용했다. 20여년 동안 동서독의 민심이 꾸준히 연결되어 왔기 때문이다. 동서독 사이 민심의 연결을 통해 통일의 구심력이 커가는 과정에서 그동안 분단을 지속시켜왔던 국제 정치적 세력균형이 깨지면서 독일이 통일된 것이다. 바꿔 말하면 통일의 구심력이 원심력보다 커진 결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통일의 구심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남북한 민심을 연결해 나가야 하는데, 그 방법은 역시 남북경제협력과 대북지원이다. 그런 방법의 효용이 독일에서 입증되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대북지원을 '퍼주기'라고 비난하지만, 경제적인 협력과 지원 외에 통일의 출발인 남북 민심의 연결 방법이 따로 있을까?

동북아의 국제정치 구조상 무력에 의한 통일은 애당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건 6.25동란을 통해 입증되었다. 북한이 소련의 허락을 받은 뒤 중국의 지원을 계산하고 남침을 했지만, 미국이 즉각 개입하면서 무력통일 방식을 통한 한반도 공산화의 꿈은 깨졌다.

그러면 북한의 붕괴를 통한 통일은 가능한가? 북한이 붕괴하면 자동적으로 통일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건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북한이 붕괴할 가능성도 그렇게 높지 않지만, 설사 붕괴한다 하더라도 한반도가 처한 지정학적 상황과 동북아 국제정치의 역학구조가 동서독의 경우와는 또 다르기 때문에 북한 지역이 바로 우리 차지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북한이 붕괴한다하더라도 북한지역에 대한 통치권의 향배와 관련한 국제정치적 간섭이 들어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국제정치적인 간섭요인을 최소화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은 통일 원심력보다 구심력을 키우는 것이다. 구심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바로 민심을 연결시켜야 한다. 같은 민족끼리 민심이 연결되어 하나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독일의 통일 전략

독일의 경우, 동서독의 민심이 연결된 것은 동독에 대한 서독의 대대적인 지원 때문이었다. 1969년 사민당이 집권하면서 빌리브란트 수상이 동방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동방정책은 동독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브란트의 사민당 정부는 처음에는 현금지원성 사업들을 하다가 동독의 대서독 의존성이 상당 정도 생긴 뒤에는 현물로 주기 시작했고, 의존성이 더 커진 뒤에는 조건을 걸었다. 신문 방송의 개방, 동독을 방문하는 서독 가족 친척들의 체류기간 연장 등의 조건을 달고 지원을 계속했다. 서독 사람들이 동독에 있는 부모나 친지를 만나러 들어갈 때 서독 화폐를 동독 화폐로 바꿔야 했는데, 그 상한선을 올리라고 요구한 것은 동독이 아니라 서독이었다. → 반민족행위자들이 퍼주기라고 비난할 정책.

독일의 통일 비용과 대북지원금 비교

1969년 동방정책이 시작된 날로부터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까지 20년 동안 서독 정부가 직접적으로 또는 교회 등 민간에 넘겨, 동독에 지원한 돈과 물자가 1044억 DM(도이치마르크)나 되었다. 달러로 환산하면 약 580억 달러 정도다. 20년 동안 580억 달러가 서독에서 동독으로 건너갔는데, 연간 규모로 따지면 약 29억 달러다. 그렇게 돈과 물자가 들어가는 동안 동독의 국방력이 커졌다면, 서독이 동독에게 군사적으로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동독의 군사력이 커진 것이 아니라 동독의 민심이 서독으로 넘어도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통일의 구심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연간 29억달러(3420억원)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남한이 북한에 지원한 연간 최대 4억달러(470억원)의 7배가 넘는 규모다. 서독이 한국보다 잘사는건 분명하지만, 한국의 GDP 총액이 2014년 말 현재 약 1조 4500억 달러 정도 되는데, 독일의 경우 3조 8200억 달러 정도다. 경제력 면에서 독일이 우리의 2.6배 정도 크다. 그러나 독일이 우리보다 7배도 넘는 규모의 지원을 동독에 20년 동안 꾸준히 지속했다는 건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통일에 대한 정치와 국민의식 비교

특히 연간 29억 달러라는 돈이 20년간 동쪽으로 넘어갈 때 서독의 국회나 여론은 거기에 대해 크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대북지원을 둘러싸고 일었던 남한내부의 갈등과 같은 것이 서독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거기에 독일과 우리의 차이가 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대북지원을 두고 '퍼주기'니, '종북'이니 비판을 많이 하는데 독일에서는 그런게 별로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독일에서는 진보적인 사민당이 시작했던 대동독 지원정책을 정권이 교체된 뒤에도 보수적인 기민당이 그 정책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1982년, 사민당으로부터 13년 만에 정권을 되찾은 기민당의 헬무트콜(Helmut Kohl) 총리는 총리 수락 연설에서 사민당의 통일 외교정책인 동방정책을 계승하겠다고 약속했다. 기민당내 일부에서 당연히 반발했다. 심지어 콜 총리 탄핵론까지 나왔다. 그러나 콜 총리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방정책을 계속 밀고 나갔다.

그 결과 기민당 집권 7년 만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그 이듬해 독일이 통일 됐다. 당연히 독일이 통일될 때으 집권당은 기민당이었다. 말하자면 정권의 이념 성향이 보수건 진보건 대동독 지원을 일관성 있게 계속한 것이 독일 통일의 구심력을 키워줬고, 그것이 커나가는 과정에서 통일의 원심력으로 작용해왔던 유럽의 세력균형이 깨져버린 것이다. 기민당이 집권하고 나서 이전 정권의 대동독정책이라는 이류로 동방정책을 폐기하고 정책방향을 바꿨더라면 결코 독일통일은 이뤄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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