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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미신궁의 텐지천황과 백강전투

일본 교토부(京都府) 오쓰(大津)시에는 오우미신궁(近江神宮)이라는 유서깊은 사당이 있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별로 찾지 않는 곳이지만 고대 백제와의 각별한 인연을 지닌 사당이다. 이 신궁에서 모시고 있는 신주가 덴지천황(天智天皇, 626-672)이다. 덴지천황은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에 구원군을 파병한 당사자이다. 일본 규슈(九州)지역을 중심으로 지금도 흔적이 남아는 백제식 산성의 축성을 주도한 인물도 덴지천황이다.

덴지천황은 백제 패망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인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땅을 내주며 정착케 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일본인들은 덴지천황을 ‘백제 마니아’ 또는 ‘백강 전투를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부르기도 한다. 다분히 냉소적인 시각이 깔려 있다. 덴지천황은 무엇 때문에 백제 마니아가 되었을까. 그가 백제 구원병을 파병한 배경은 무엇일까.

대전일보사의 오우미신궁 취재에는 홍윤기 충남도 백제사 정책 특보(문학박사, 한국외국어대 교수)가 동행했다. 그는 그동안 수 차례 오우미신궁을 답사했고 덴지천황과 오우미신궁에 관한 논고를 발표해 왔다. 그의 저서 ‘일본 속의 백제 나라(奈良)’(한누리미디어) 등에도 고문헌과 일본 사학자들의 인터뷰 등을 토대로 덴지천황과 오우미신궁에 관한 글을 싣고 있다. 홍 특보는 “덴지천황은 백제인과 가장 연고가 깊은 인물이고 오늘 날까지 현존하는 오우미신궁은 그 연결고리”라고 말한다.

오우미신궁의 고색창연하다. 웅장하면서도 화려하고 단아한 기품까지 느끼게 한다. 신궁 입구에서 계단을 오르면 미려한 모습의 건축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덴지천황을 모시고 있는 본전은 신궁의 내원에 있고 주위를 외원이 감싸고 있다. 외원과 내원은 복도로 연결된다. 신궁을 감싸고 있는 엄숙한 분위기 때문인지 절로 발걸음이 경건해 진다. 일본의 다른 신사와는 다른 분위기다. 일반 참배객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우미신궁 측은 한국의 기자들을 위해 특별한 ‘의전’을 준비했다. 남녀 신관이 제례복을 입고 나와 덴지천황에게 예를 올리는 의식을 시연해 줬다. 홍윤기 특보는 “쉽지 않은 배려”라고 귀띔했다. 덴지천황을 모신 본전에 들어서자 남녀 신관이 두 손을 모으고 입장한다. 이어 북을 치고 경을 읽는 의식을 보여준 뒤 신주(神酒)를 올리고 기도를 드리는 순서가 이어진다. 우리의 전통 제례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들 신관은 우리 일행의 안녕을 덴지천황에게 기도했다고 한다. 백제에 구원병을 보내고 백제 유민들을 극진히 배려할 만큼 백제와의 연고가 깊은 덴지천황이 130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낯선 방문객을 굽어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묘한 기분이 든다.

텐지천황과 백제

덴지천황의 백제와의 연고는 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생부는 제34대 조메이천황(敍明天皇)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조메이천황이 나라 땅의 구다라강(百濟川) 강변에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지(百濟寺)를 짓고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641년 구다라궁에서 죽었으며 왕궁의 북쪽에 조메이천황을 안치하고 이를 ‘백제 대빈’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현재에도 구다라궁 인근에는 ‘구다라사삼중탑(百濟寺三重塔)’이 세월의 비바람을 견디며 서 있어 당시의 흔적을 엿보게 한다. 조메이천황의 백제에 대한 남다른 애착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일본 고대 왕실의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일본 제30대 비타쓰천황(敏達天皇)은 백제인 왕족이라고 밝히고 있다. 비타쓰천황은 다름아닌 조메이천황의 조부이다. 조메이천황은 물론이고 아들인 덴지천황 역시 백제계 혈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덴지천황이 백제 구원병을 파병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왜와 백제와의 혈연설의 근거다. 국내 사학자들이 고대 백제가 일본 왕실을 장악하며 지배했다는 논거도 이런 사실에 기인한다.

663년 덴지천황이 파병한 구원군은 지금의 금강인 백촌강(白村江) 하구에서 나·당 연합군과 일전을 벌인다. 그러나 백촌강 전투는 왜의 전멸이라는 참담한 패배로 끝난다. 400여 척의 전함이 불 타고 2만7000여 명의 구원군도 거의 모두 전사한다. ‘삼국사기’에는 ‘왜의 400 척의 군함이 전쟁에서 패해 백강(白江) 하구에서 불태워졌는데 그 연기와 불꽃으로 하늘과 바다가 모두 붉게 물들었다’고 전한다.

이날 오우미신궁의 사토 히사다다(佐藤久忠) 궁사(宮司, 신궁의 책임자)는 취재진에게 “백촌강에는 당시의 전투를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냐”고 궁금증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해마다 백촌강을 다녀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패망의 역사에 대한 기억과 관심이 오늘날의 일본인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덴지천황은 백제 유민들을 극진히 배려했다. 홍윤기 특보는 “덴지천황은 백제 멸망 직후에 일본으로 건너 온 백제인 400여명을 오우미 땅 가무사키(神前)군에서 머물게 하고 주택과 논밭을 마련해 줬으며 665년 10월에는 백제인 남녀 2000명을 아즈마국(東國)에 살도록 터전을 마련해 줬다”고 설명했다. 또 “666년 3월 오우미 땅으로 천도한 뒤에는 좌평 여자신(余自信)과 좌평 귀실집사(鬼室集斯) 등 백제인 남녀 700여명을 오우미의 가모(蒲生)군으로 불러 들인 사실이 일본서기에서도 전한다”고 덧붙였다. 덴지천황이 오우미 땅으로 천도한 것은 당시 오우미에 터전을 잡고 있던 백제인들의 기술과 경제력 등을 기반으로 했다는 게 사학계의 중론이다.

텐지천황과 일본의 백제식 산성

덴지천황은 백촌강 전투에서에서의 참패 이후, 일본 열도의 방어에 힘을 쏟았다. 나·당 연합군이 침공해 올 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백촌강 전투 2년 후인 665년에 지금의 후쿠오카(福岡)현 다자이후(太宰府)에 오노성(大野城)을, 사가현(佐賀)현에 기이성(基肄城)을 축성케 했고 667년에는 나가사키(長崎)현 쓰시마(對馬島)의 가네타성(金田城)과 나라현에 다카야스성(高安城)을 각각 구축했다. 이들 산성은 일본 고대 산성 가운데 대표적인 백제식 산성으로 꼽힌다.

오우미신궁에는 기념비적인 유물이 있다. 덴지천황이 백제인 기술자를 시켜 만든 물시계다. 이 시계는 3층에서 떨어지는 물의 양에 의해 시간을 재는 일본 최초의 시계다. 이와 관련 일본에서는 오우미 땅을 일본 시계의 발상지로 기념하며 해마다 축제를 열고 있다. 또 오우미신궁에는 물시계와 함께 동서고금의 시계를 상설 전시하는 시계 박물관이 있다. 오우미지역에는 이밖에도 백제인 가람 백제사도 남아 있다.

백제계 덴지천황의 꿈과 좌절이 어려있는 오우미신궁을 나서는 순간, 문득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 부흥의 마지막 혼을 불살랐던 백제와 왜 구원군의 함성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출처: 대전일보 (2009.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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