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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 고분군(백제왕릉원)

부여 능산리 고분군

부여중심지에서 논산 방향으로 2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사비시대(538~660년)의 백제 왕릉묘역이다. 나성(羅城)의 동쪽 바로 바깥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정비되어 있는 7기(基)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도 각기 고분이 분포하고 있어 크게 3개의 무덤군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가운데 중앙 구역에 위치한 무덤들이 그 크기나 위치로 보아 사비시대 역대 왕들의 왕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고분군의 입지는 전통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 지세(地勢)와 잘 일치되고 있어 백제 당시에 이미 풍수리리사상이 있었을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이래 여러차례 조사되었으나 부장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옻칠과 금박으로 장식된 관(棺)의 파편만 남아 있었다. 최근 나성과 능산리 왕릉모역 사이의 계곡에서 이곳에 안장된 역대 왕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절터가 조사되었는데, 그곳에서 백제 금속공예의 진수를 말해주는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백제창왕명 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가 출토되어 백제문화의우수성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7기의 고분중 1호분에는 공주 송산리 6호분과 마찬가지로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교류를 증명해 주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출처: 백제왕릉원.

의자왕 가묘(좌)와 능산리 고분군(우)

의자왕과 아들 부여융의 가묘

의자왕의 생애

백제 31대 의자왕(義慈王)은 무왕(武王) 3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성품은 부모를 효로써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있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는 칭송이 자자하였고, 용감하고 담대하며 결단력이 있었다. "과단성 있고 생각이 깊어서 그 명성이 홀로 우뚝했다"는 평의 기록이 전하고 있다.

즉위 후 유교정치사상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고 국내를 순무(巡撫)하면서 사형수 외에는 모두 방면하여 민심 수습에 적극 나서 인덕정치를 베풀었으며 신라의 40여개 성을 일거에 함락시키는 전과와 신라의 옛 가야지역에 대한 통치 거점인 대야성(경남합천)을 점령하는 등 탁월한 군사적 재능이 있었고 외교에도 당(唐)과는 공존을 모색하고 왜(倭)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고구려와는 연화하여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 등 국제관계의 흐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이 있는 감각을 지녔다.

그러나 의자왕은 재위 15년에 이르러 정적들이 제거되자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식읍(食邑)까지 내려주는 등 국내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660년 7월에 신라와 당 동맹군의 전격적인 침공을 받게 된다. 황산벌 전투로 사세가 불리해 지자 의자왕의 태자 효(孝)와 함께 웅진성(熊津城)으로 몸을 피하고 의자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사비성을 굳게 지켰으나 결국 동년 7월 13일에 항복하였다. 9월 3일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회군할 때 의자왕은 당으로 압송된 후 4개월만에 당나라에서 병사하니 당나라 북망산에 오(吳)와 진(陳)의 군주인 손호와 진숙보의 묘소 곁에 묻혔다. 당 조종은 의자왕을 '금자광록대부위위경'에 추증하고 의자왕의 묘소에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의자왕과 부여융의 가묘 설치기

700년의 유구한 백제종묘사직이 무너지고 백제의자왕과 태자 융, 그리고 문무백관을 비롯 백성 12895명이 당나라에 끌려간 치욕적 사실을 어찌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1995년 2월에 현지조사를 통하여 중국 하남성 낙양시 맹진현 봉황대촌 부근에서 의자왕 묘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확인 하였다. 1996년 8월 부여군과 당나라 수도였던 낙양시 양 도시간에 문화교류사업을 위한 자매결연을 맺고 1999년 4월 부여융 묘지석 복제품을 기증받았다. 2000년 4월에 낙양시 북망산에서 의자왕 영토만혼제를 올리고 영토를 모셔와 부여 고란사에 봉안하였다가 동연 9월 30일에 이곳 부여 능산리 선왕의 능원에 좋은 자리를 마련하여 의자왕 및 부여융의 영혼을 위로하고 깊이 추면코자 단을 마련하게 되었다.

의자왕과 부여융을 상하로 모셔 의자왕의 단에는 주실과 전실로 구성된 석실을 마련하고 목관에 영토를 봉안했으며 의자왕의 출신과 품성, 생애등을 기록한 지석, 설단의 의의와 장지 구입을 기록한 매지권을 매납하여 후세에 알 수 있도록 했다.

부여융의 단은 의자왕을 따랐으며 내부에 낙양시에서 기증받은 묘지석 복각품을 매설했다. 우리들 백제후예의 간절한 소망과 정성을 모아 의자왕이 하세하신지 1340여년만에 소부리땅 선왕의 능원에 모셔 영혼을 천추만세까지 추모하고자 한다. 2000년 9월 30일. 출처: 능산리 고분군 의자왕 설단사적기

부여융

부여융(扶餘隆)은 의자왕의 아들로 644년(의자왕4년)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왕성이 함락될 때 의자왕과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신라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해 9월 당나라 장군 소정방을 따라 의자왕과 함께 당의 수도 낙양(洛陽)으로 끌려갔다. 이듬해 백제의 유민 복신(福信), 도침(道琛) 등이 부여풍(扶餘豊)을 옹립, 주류성(周留城)을 근거로 부흥운동을 일으키자 당나라 장군 유인궤 등과 수군을 이끌고 들어와 백마강에서 이들을 무찔렀다.

665년(문무왕5년) 웅진도독이 되어 백제의 옛 땅을 다스렸다. 그 후 신라의 항당 정책으로 압박을 받다가 676년 당나라에 돌아가 광록대부태상원외경 겸 웅진도독 대방군왕에 봉해지고 낙양세서 죽었다. 죽은 뒤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보국대장군을 추증받았다. 묘지는 허난성 뤄양의 망산(芒山)에 있다. 출처: kocca 문화콘텐츠닷컴 扶餘隆墓誌石 中

작성: 2015.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