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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사

무량사 석등 5층석탑 과 극락전

만수산(萬壽山) 기슭에 자리잡은 무량사(無量寺)는 9세기 통일신라 문성왕(839~856)때 범일국사(梵一國師) 가 창건했고, 신라 말 무염대사가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고려초기에 대중창하여 대웅전, 극락전, 천불전, 응진전, 명부전 등의 불전과 30여동의 요사와 12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고 조선 인조(1623~1649)때 진묵선사에 의해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 경내의 극락전을 중심으로 5층석탑과 석등, 미륵 괘불 등의 국가지정보물과 사천왕문, 명부전, 영산전, 천불전, 산신각, 극락전 후불탱, 동종과 당간지주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현 사찰의 동쪽에는 최근 고려 초기의 사찰터가 발견되어 당시 커다란 가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곳은 조선 세조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부도(浮屠)와 영정(影幀)이 있어 더욱 뜻깊은 사찰이라 할 수 있으며 주변에 도솔암과 태조암, 무진암이 있다. 김시습은 21세 때에 수양대군(후의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불교에 입문하여 만년을 무량사에서 보내다 입적하였다.

설잠(김시습)스님 영각
무량사 김시습 영정

김시습이 생을 마감한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무량사도 그곳의 하나이다. 그와 관련되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김시습은 59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병사하였는데, 죽을 때 화장하지 말 것을 유언하여 절 옆에 시신을 안치해 두었다고 한다. 그 후 3년 뒤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시와 같아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고 불교식으로 다비를 하고 유골을 모아 부도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무량사에 있는 김시습의 부도와 영정(보물 1497호)은 이러한 이야기가 사실임을 말해주는 듯 하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이다.

김시습 초상

"김시습 초상"은 좌안7분면의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밀화영의 곤이 달린 평량자형의 입을 쓰고 담홍색 포를 업고 있으며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다. 얼굴과 의복은 옅은 살구색과 그보다 약간 짙은 색상의 미묘하고 절제된 조화로 묘사되고 있다.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표정은 "찌푸린 눈썹에 우수 띤 얼굴이라" 고 묘사했던 서유영(1801~1874)의 배관기와 상통하는데, 눈의 총기가 생생하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초상화라는 인물사적 가치 위에 조선시대 야복초상화의 가작이란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무량사 김시습 부도

부도는 아래에 3단을 이루는 기단(基壇)을 마련하여 그 위로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올렸는데 모든 부재의 단면이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위 ㆍ아래받침돌에 연꽃을 장식하고,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에 쌓인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을 새겼다. 탑신의 몸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연꽃덮개가 조각된 지붕돌은 꽃장식이 달린 여덟 귀퉁이가 높게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복발(覆鉢 : 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과 보주(寶珠 : 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등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김시습부도는 조선시대의 부도로, 당시의 작품으로는 조각이 매우 우수하고 화려하다. 일제시대 때 폭풍우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함께 넘어졌는데 그 때 밑에서 사리 1점이 나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무량사의 대표적인 유물들로는 오층석탑(보물 제185호), 석등(보물 제233호), 극락전(보물 제356호), 미륵불괘불탱(보물 제1265호)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재들이 많이 있다. 출처: 사이버문화재탐방 / 국가문화유산포털

무량사 가는 법

무량사는 외산터미널에서 도보 약 30분거리에 있다. 외산터미널까지는 부여터미널에서 외산행 버스를 타면 되는데 편수가 많지 않으므로 돌아오는 버스를 미리 물어보아야 한다. 참고: 부여여행기

작성: 201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