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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기독교 역사기행 '주문도의 서도중앙교회'

글: 이종전 교수

강화도하면 본도만 생각한다. 조금 알면 석모도, 교동 정도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강화도에는 많은 섬이 있다. 그중에도 오늘 찾아가려고 하는 서도중앙교회는 주문도에 있다. 주문도는 석모도 서남쪽에 자리한 세 개의 마을을 가지고 있는 작은 섬이다.

주문도를 찾기 위해서는 별도로 날을 잡아야 한다. 먼 뱃길이기에 아직 남겨진 자연 그대로의 정경을 경험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여행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여유를 가지고 찾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섬은 지리적으로 해상 방어에 요충지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군량미와 무기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가 있었다. 해서 이 섬에 있는 마을 이름들이 무관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즉 대빈창(待濱倉), 진촌(鎭村)이라는 마을 이름이 진지와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얻어가진 것이리라.

이 섬에 가기 위해서는 외포리에서 출발하는 배편을 이용해야 한다. 하루 두 차례 왕복하는 배를 이용해서 찾아갈 수 있다. 시간적인 여유가 조금 있다면, 오후에 떠나는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가 살펴본 다음에 다음날 나오면 섬을 돌아보기에 충분할 것이다. 작은 섬이지만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신앙의 역사는 감격적인 것이기에 어느 곳 보다 기대가 크고, 영적으로 풍성함을 느끼게 된다.

외진 이 섬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1893년이다. 그렇다면 강화도 본도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과 같은 시기라는 의미에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강화본도가 아닌 이 작은 섬에 복음이 그렇게 일찍 전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1893년 여름 본도에서 사역하고 있던 성공회의 신부 왕대인(L. O. Warner)과 갈대인이라는 또 다른 외국인, 그리고 매음리(梅音里)에서 사역하고 있던 윤정일 전도사가 함께 주문도에 들어와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복음을 영접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복음을 접할 수 있던 기회가 일찍이 주어졌다는 것은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러 1902년 5월에 윤정일 전도사가 다시 이 섬을 찾아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섬에 교회가 형성될 수 있었다. 10년 전에 이곳에 윤전도사가 들어왔을 때는 성공회 소속 전도인이었는데 이번에는 감리교회의 전도인 신분으로 이곳에 들어와 복음을 전했다.

여름이면 응개지나루가 성시를 이루는데, 이 지역에서 고기가 많이 잡히기 때문에 자연히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인해서 북적였고, 술집은 물론 색시집이 많았다고 한다. 바로 이 나루에 등장한 것이 윤전도사였다. 그는 응개지나루에서 회개할 것을 외치면서 천국을 소개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미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요한과 같은 존재였다고 상상이 된다.

그의 전도하는 모습이 미친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니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뿌려지는 곳에는 열매가 있는 법, 김근영(金根永)이라고 하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개성을 오가는 일을 하던 사람으로서 이미 개성에서 천주교와 접촉을 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윤전도사의 전도를 받고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앙을 고백한 후에 그는 집안에서 섬기던 신주와 사당을 모두 제거하고, 개종한 사람으로서 거듭난 생활을 했다. 이로 인해서 마을 사람들은 물론 집안에서 까지 많은 따돌림과 멸시가 있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으며 서도중앙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영생학교의 설립

윤정일의 전도와 김근영의 개종은 현재의 서도중앙교회의 시작이고,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외딴 섬 주문도에도 복음의 바람이 불게 되었던 것이다.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던 김근영이 1905년 2월 정부로부터 진촌의 군영지(軍營地)를 불하받아서 영생학교를 세워 신교육의 장을 만듦으로서 그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섬 중에 섬인 주문도, 고작 세 개의 마을이 전부인 작은 섬에서 신교육이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상황인데, 그에 의해서 학교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외면만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주민들의 입장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김근영의 끈질긴 전도는 진촌의 세도가인 박승형(1837-1912)과 승태 형제가 개종을 선언하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박승형은 무반(武班) 종3품으로 중앙정부의 높은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이 외딴 섬인 주문도에 들어온 연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의 정세가 매우 혼탁했기에 어떤 일인가에 의해서 이 섬으로 피신하여온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그의 아들 박순병(1861-1938)도 종9품의 감역(監役)으로 주문도의 정부 토지를 관리하는 벼슬을 하고 있었기에 작은 섬 주문도에서는 박씨 문중에 필적할 만한 가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문중의 어른인 박승형이 개종을 하니 집안은 물론 마을 사람들도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교회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김근영이 세운 영생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도록 권면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꺼려하면서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박씨 문중의 개종은 마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개화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상투를 자르는 일과 마을에 굿하는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식 교육을 받으면서 생각하는 것이 변하니 생활습관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닫게 되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제로 생활에 적용하면서 서로 용서하고, 어려움을 나누는 일을 하게 됨으로서 어려운 형편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었다. 세도가인 박씨 문중에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에 그들의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특별히 많은 빚을 지고 있던 사람이 그 빚을 갚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2000원이나 되는 거금(현재 화폐가치로 1억 원 상당이라 함)을 갚지 못하고 그 아들에게 승계시켰던 것이다. 이에 박두병은 1917년 정월에 그 빚을 탕감하여주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종순일 목사 앞에서 탕감을 선언하게 되었다. 종순일 목사 자신도 강화도 홍의교회에서 개종을 하였을 때 마을 사람들에게 빚을 탕감하여 줌으로서 맹목적으로 교회를 비판하고 박해하던 사람들을 조용하게 만들었고, 홍의교회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 장본인이었던 종순일 목사지만 박두병의 결정을 강요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박두병은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는 결정을 함으로써 주문도 복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작은 섬 주문도가 복음화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개종한 사람, 특히 이 섬의 절대 세도가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개종과 변화된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박씨 문중의 유력한 사람들의 개종과 함께 이 섬의 주민들은 교회에 대한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주문도가 유난히 복음화율이 높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02년에 복음이 들어와 10년의 세월이 지났을 때 당시 주문도 주민의 75%가 교인이라는 통계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놀라움은 당시의 것만이 아니다. 현재에도 섬 주민의 90% 이상이 신자라고 하니, 이 섬에는 술집도 노래방, 다방도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진촌교회 (서도중앙교회)

서도중앙교회의 예배당을 처음으로 대할 때 느껴지는 것은 강화읍내에 있는 성공회 강화읍 성당과 온수리 성당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곳을 아는 사람이라면, 혹시 이곳도 성공회 교회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할 만큼 비슷하다. 아마 당시로서는 섬의 특성상 강화읍 성당이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느껴지고, 그렇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기에 이 작은 섬에서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예배당들을 모델로 해서 건축했다는 것은 그만큼 강화읍 성당이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처음으로 서도중앙교회의 예배당을 보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어떻게 이 작은 섬에 이렇게 웅장하고 멋진 한옥의 아름다움과 품위를 느끼게 하는 예배당이 있을까, 눈을 의심하게 한다. 고풍스러운 기와가 그 역사를 말하고 있고, 한옥구조의 팔작지붕이 품위를 더해주고 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배의 고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누각(종각)은 특별한 느낌을 준다. 누각의 모양을 하되 정면은 두 칸으로 옆면은 한 칸으로 올려졌으며, 특이하게 창을 달아 모양을 냈다. 그 모습은 사대부집의 솟을 대문 같으니 들고나는 사람들이 출입구임을 알게 한다. 하지만 이고 있는 지붕도 아담하면서 고풍스러운 멋을 한껏 내고 있으니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말을 잃게 한다.

정면에서 보면 서도중앙교회의 현재이름인 진촌(鎭村)교회라는 현판이 누각의 처마 밑에 걸려있다.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단아한 시골 선비의 집에 걸려있는 작은 현판같은 느낌이 좋다. 어느 누각에서 볼 수 있는 검정색 목판에 새겨진 흰색 글씨기 옛 멋을 더하게 한다. 돌멩이를 박아서 쌓은 벽채 하단부분은 기와집 벽채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고, 정면에 네 짝의 대문은 금방이라도 “이리 오너라!”하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대문 아랫부분을 받치고 있는 대리석은 이 작은 섬에서 이 예배당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희생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흰색의 회벽은 정갈함을 더한다. 기와에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색깔이지만 수수한 기와에 흰 벽채는 정결하고, 단아한 맛을 더하여 준다. 하지만 어디를 보아도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옛 건물, 하지만 건물 뒤로 가면 벽면에 십자가 모형을 벽면에 창문을 이용해서 만들어 놓았다. 어쩌면 눈높이에서 바라보며 생각하게 하는 배려가 아닐지? 요즘 같은 현실에서는 매우 소극적인 표현이다.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십자가 탑을 올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네온을 달아 밤에도 불을 밝혀서 교회의 위치를 알리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정말 소박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 예배당은 1923년에 건축된 건물로서 목재는 물론 기와와 마루, 벽면까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데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예배당 건물 가운데 가장 그 원형이 잘 보존된 건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도 주일이면 이 교회의 교육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예배당 건물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주문도 신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헌금을 했고, 당시의 돈 7000원을 모아서 건축을 했다고 하니 당시 신자들의 헌신과 희생을 짐작하게 한다.

정면은 5칸 측면은 7칸의 규모로 지은 예배당은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다시 놀라게 된다. 나무 마루가 깔려있고, 예배당 중앙에 두 줄로 늘어선 기둥은 성당이나 성공회 예배당을 연상하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예배당 건축에 영향을 미친 것이 성공회 강화읍 성당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닮아있기 때문이다.

주문도에서 이러한 예배당을 만나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1923년도에 이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건축자재가 주문도에서 공급될 수 있을 이 만무다.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자재를 강화도에서 들여와야 했단다. 운송수단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달구지(우마차)가 유일한 것이었다. 나룻터에서 진촌까지 두 마리의 소가 건축자재를 나르다 쓰러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대역사였다.

작은 섬마을에는 격에 맞지 않다고 할 만큼 큰 규모이지만 단층건물의 단아함과 자연스러운 색상은 주변과 잘 어울린다. 비록 한옥구조에 어울리지 않는 유리창이 달렸지만 실용적인 측면과 일제시대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기도 한다. 자연을 거슬리지 않고 조화롭게 지어진 예배당 건물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답사자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예배당 내부의 특별함은 온수리 예배당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그대로 옮겨진 것 같다는 느낌이다. 감리교회 예배당임에도 성공회 예배당과 똑 같은 구조로 지어졌다. ‘바실리카식'이라는 구조인데 중앙에 회중석이 있고, 두 줄로 세워진 12개의 기둥, 그리고 양쪽의 회랑이 뭔가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예배당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다. 전형적인 성공회 예배당의 구조라 할 것이다.

하지만 강대상 뒤에 벽채에 만들어진 십자가 모양의 두 개의 창은 눈에 거슬린다. 성공회 강화읍 예배당과 달리 단층으로 지은 이 예배당은 전기가 없던 시대에 어두운 것이 흠이었기에 1960년대에 벽을 뚫어서 만든 것이란다. 건물에도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밝은 빛이 강대에 선 설교자 뒤에서 비치니 설교자의 얼굴이 어두워져서 매우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예배당을 지었던 당시 이곳의 사람들은 아마도 강화도에 지어진 성공회 예배당들이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들의 신앙과는 관계없이 그러한 예배당을 가지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이 예배당을 짓겠다는 일념으로 힘을 모았을 것이다. 순수한 신앙이라는 점에서는 아름답고 대단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예배당 내부는 의자도 없이 드러난 서까래의 나무색을 그대로 살린 한옥의 멋이 다른 장식을 필요로 하지 않게 한다. 사이사이를 흰색의 회를 발라서 깨끗한 멋을 더하게 했다. 그러한 내부에 다른 어떤 장식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한옥구조에 어울리는 편액(扁額)이 세 개가 걸려있는 것이 우리나라 어느 예배당에서도 접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누각이나 정자에 걸려있는 편액이 예배당 안에 걸려있는 것이 특별하고 지나칠 수 없게 한다.

하나는 이 교회가 운영하던 영생학교의 교사인 신원철(申元徹)과 모태정(牟泰貞)이 1926년에 지은 “영세기념사”(永世記念辭)로서 교회가 힘을 모아 영생학교 교사(校舍)를 신축했다는 내용을 적은 것이다. 당시 거금 2,400원을 헌금하여 학교건물을 지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는 1927년, 당시 담임 목사였던 김성대(金成大)가 쓴 기념서(紀念書)로서 윤정심이라는 전도부인이 50원을 헌금해서 예배당 종을 구입하고 그것을 기념하여 남긴 편액이다.

먼저 사용하던 종도 그의 아버지가 기증한 것으로 사용하던 중 깨져서 소리가 나지 않아 새로운 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딸인 윤정심이 기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제말기에 전쟁물자를 조달하기에 혈안이 되었던 일경에 의해서 강제로 공출되어서 지금은 접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마지막 하나는 최근의 것으로 1993년 이 교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이 교회에 시무했던 이기삼(李起三) 목사가 지은 회두시(會頭詩)로서 ‘서동중앙교회백주년기념축시'이다. 여느 건물에서 맛볼 수 없는 것, 아니 우리나라 어느 교회 예배당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여기 서도중앙교회에서는 경험할 수 있으니 작은 섬마을에서 한국교회의 또 다른 일면을 보는 기쁨이란 답사자만의 것이리라.

출처: 2006년 8월 27일자 인천기독교신문 (http://www.ic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