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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가족 및 친인척

박정희 가계도
박정희 가계도

박정희

박정희(1917~1979)는 몰락한 양반가의 후손인 아버지 박성빈(朴成彬 : 1871년 ~ 1938년) 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 1872년~1949)에게서 5남 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박동희 (1895~1967)

박정희의 큰형 박동희는 66세때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하여 대통령이 된 뒤에도 고향인 경상북도 구미면 상모리에서 농사꾼으로 살다가 죽었다.

박동희는 1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 박재홍은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당시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를 다니고 있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도 이렇다할 직장을 갖지 못하다가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에, 최고회의 의장비서실장을 지낸 박태준 포철 사장이 비서실에 취직을 시켜 주었고, 28세에 포항종합제철(주)의 행정실장(1969) , 32세에 동양철관(주) 을 설립하여 사장(1973)이 되었으며, 박정희가 살아있을 때는 정치판에 들어오지 않다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1대부터 민정당 국회의원후보로 출마하여 구미, 선산,군위, 칠곡군 지역구에서 당선되어(1981) 내리 4선을 했다. 14대 때는 국회 건설교통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13대 총선 때는 사촌동생인 박준홍과 맞붙어 박정희 일가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박태준의 딸 가운데 디자이너인 박경아는 전두환의 아들 전재용과 이혼을 하고, 김병주와 결혼을 하였다.

박동희의 딸 박재선은 1971년에 남편을 따라 도미(渡美)했다. 남편 정동하(鄭東河)는 경북대 의대를 나와 미국으로 유학해 그곳에서 의사 생활을 했다. 1996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자민련에 입당했다. 출처: 월간중앙

박무희 (1898~1960)

박정희의 둘째형 박무희(武熙)는 지주 장승원으로부터 논 다섯 마지기를 빌려 부쳐먹던 가난한 소작농이었는데, 큰형 박동희와 마찬가지로 경북 선산에서 평범한 농민으로 살다 박정희가 군사반란에 성공하기 1년 전인 1960년에 사망했다.

박무희는 2남1녀를 두었다. 박무희 일가는 박정희가 집권하기 전까지만 해도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웠다. 장남 박재석(在錫)은 한때 구미에서 연필장사를 했고, 차남 박재호(在浩)는 벽돌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아버지의 등극으로 신세가 폈다. 박재석은 박정희 재임 시절 국제전기기업 회장을 지냈고, 박재호는 동양육운 회장을 지냈다. 자민련 부총재를 지냈던 조부영같은 사람이 국제전기기업의 이사 출신인 걸 보면 대단한 은혜를 입은 것이다. 출처: 대통령 처조카와 시골군수

박귀희 (1902~1974)

박정희의 큰 누나 박귀희(貴熙)는 박정희가 태어나기 전 칠곡군 석적면의 은(殷)씨 집안으로 출가해 그곳에서 살다 생을 마쳤다. 박귀희는 3남2녀를 두었는데 서울에서 개인사업을 한 3남 은희만을 제외하고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은희만이 가수 은지원(殷志源, 1978년 6월 8일 ~ )의 아버지이므로. 은지원의 할머니가 박정희의 큰누나가 된다.

박상희 (1906~1946)

박상희(朴相熙)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언론인이며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의 셋째형이기도 하다.박정희는 형제 중에서 특히 셋째형 상희씨 가족에 애틋한 감정을 가졌다. 해방후 구미에서 “동아일보” 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활동하던 박상희는 집안의 빛과 같은 존재였다. 박정희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형제이기도 했다. 구미의 박정희가에서 “우리 집안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상희”라고 할 정도로 집안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박상희는 일제 때부터 신간회 간부로 항일투쟁을 벌여 구미 좌익계에서 영향력과 신망이 대단했는데, 구미폭동을 지휘하다 경찰에 사살됐다. 당시 나이 39세였다.

박정희는 박상희가 남겨두고 간 유족에게 유달리 애착을 가졌다. 군인 시절에도 틈틈이 셋째형 일가를 도왔다. 그중에서도 박준홍(朴埈弘: 1947~) 은 외아들이자 유복자였다. 박준홍은 1970년에 경희대를 졸업하였고 미국 조지워싱턴대에 유학(1974년) 까지 다녀왔는데, 박정희의 배려로 국토통일원(1974년) 과 무임소장관실 정무조정실장으로 근무하다 유신 말기에는 대한축구협회장(1978년) 까지 지냈다. 현재 한국정경문화아카데미 회장 겸 자민련 당무위원으로 있다.

박상희의 딸 박영옥(朴榮玉: 1929~)은 김종필과 결혼했다. 3공화국 때부터 ‘영원한 2인자’로 살아온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는 박상희의 큰사위다. 어릴 때부터 셋째 형 박상희의 큰딸 박영옥을 귀여워했던 박정희는 군에서 만난 장교 김종필을 배필로 주선했다. 이후 김종필은 박정희사단의 2인자로서 5·16 쿠데타를 기획해 성공시키고 3공화국을 출범시키는 데 주역이 됐다. 김종필이 이후락 등과 함께 80년 신군부에 의해서 부정축재한 재산이 환수조치됐는데 그 총 규모가 887억원이었다.

박상희의 둘째딸 박계옥(桂玉)은 김용태(金龍泰)씨(민간인 신분으로 5·16에 참여해 후에 국회의원과 무임소장관을 역임한 金龍泰와는 동명이인)에게 출가시켰는데, 박정희는 생전에 ‘조카사위 김용태’를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하도록 했다. 김용태는 1984년 처남인 박준홍과 함께 사업을 하기도 했다.

셋째딸 박금자(金子)는 총리실에 근무한 적이 있는 반기언(瀋琪彦)에게 출가시켰고, 막내딸 설자(雪子)씨는 벽산그룹 창업주인 고(故) 김인득(金仁得)씨의 차남 김희용(金熙湧) 현 동양물산 회장과 결혼했다.

박재희 (1913~1996)

박정희의 둘째 누나 박재희는 박정희가 대구사범에 다닐 때 남편 한정봉(韓正鳳)씨가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박정희가 어려서부터 형제지간의 친근감을 나눈 사이다. 그런데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상주의 모 국회의원이 재희씨 부부를 서울 성북동으로 모셔왔다. ‘대통령 누님’ 집에 청탁꾼들이 몰려들고 정치인들도 기웃거렸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경찰을 배치하고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집권 초기 친인척 관리를 맡았던 대구사범 동기동창 권상하(權尙河) 비서를 보내 상주로 내려가라고 압박했지만, 재희씨는 “대통령 누나는 서울에서 살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느냐”며 ‘단식투쟁’까지 하면서 버텼다.

박정희

박정희(1917~1979)는 육영수와는 재혼이었다. 육영수와 사이에 박근혜(槿惠·현 한나라당 부총재)·박서영(書暎·현 육영재단 이사장)·박지만(志晩·사업) 3남매를 두었고, 1950년에 이혼한 첫부인 김호남(金好南: 1920~1990)과의 사이에서는 큰딸 박재옥(在玉)을 두었다.

박재옥의 남편 즉, 박정희의 맏사위가 한병기(韓丙起: 1931~)인데, 박정희 준장이 5사단장일 때 전속부관이었다. 부하 김종필을 조카와 인연을 맺어준 것처럼 박정희는 한병기를 첫째 딸과 맺어 주었다. 1931년 강원도 속초에서 출생. 박정희가 쿠데타에서 성공한 후인 1961년에 31살의 젊은 나이로 뉴욕 총영사로 부임 → 건설공제조합 이사장(1967~69) → 선주협회 제7대 회장(1970) → 설악문화재단 이사장 → 주 칠레(1974), UN, 캐나다 한국대사 → 숭실대학교 강사 → 제8대(1971.7~1973.3) 국회의원(강원도 속초,양양,고성 지역구) → 민주공화당 총재 특별보좌관(1979) → 설악관광(주) 회장(1980~) → ※ 박정희가 죽은후 권력에서 멀어졌다가 김대중과 김종필의 연대로 재기하여, 방송개혁위원회 의원 → 외무부 정책자문위원(1990) → 국무총리 자문위원장 → 자민련 당무위원(1996) . 2남 1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한태준, 한태현이다. 참고: 청주한씨중앙종친회.

둘째딸 박근혜는 정수장학회 이사장이다. 참고: 정수장학회는 박근혜가 오빠라고 부르던 전두환이 챙겨준 생계용 배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셋째딸 박근영(박서영으로 개명)은 박정희과 육영수가 모두 사망한 1982년 풍산금속 사장 유찬우(柳纘佑)의 장남 유청(柳靑)씨와 결혼했지만 몇달만에 이혼했다. 육영재단 이사장이다. 2008년에 백석문화대학교 교수를 지낸 신동욱(1967~)과 재혼하였다.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朴志晩: 1958~) 은 상습적인 마약투약등으로 화제가 되었음에도불구하고 주위의 도움으로 전자소재기업이며 상장회사인 주식회사 EG 대표이사로 살고 있다.

박근혜 5촌간 살인사건 3대 의혹

2011년 박근혜 남매의 5촌 간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에 따르면 박용수씨가 사촌동생 박용철씨를 흉기로 살해하고 자살했다. <시사IN>은 국과수 기록을 입수하여 단순 살인으로 보기 힘든 정황들을 발견했다. 출처: 시사IN 2012.12.10 기사.

육영수

박정희의 두번째 부인 육영수 (1925~1974) 는 충청북도 옥천에서 아버지 육종관(陸鐘寬)과 어머니 이경령(李慶齡) 사이의 1남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육종관은 옥천의 만석꾼으로 유명했다. 보수적인 토호였지만 일찍이 신문물을 받아들였다. 옥천·대전 일대에서는 최초로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다녔고 당대의 유명한 연예인이나 영화인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다만 당시 부호들이 그랬던 것처럼 축첩을 했는데, 그래서 집권 초기 박정희의 장모 이경령은 청와대에서 살고 장인은 소실과 함께 서울에서 기거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육인순

육영수의 형제로는 큰언니 육인순(陸寅順·1914∼1972), 오빠 육인수(陸寅修·1919∼2001), 여동생 육예수(陸禮修·1929년생)가 있다. 박정희가 친어머니처럼 극진히 모신 장모 이경령은 말년을 청와대에서 보냈고, 주로 육영수가 부른 것이기는 하지만 처조카들도 자유롭게 청와대를 출입했다.

육영수의 형제들은 박정희 형제들과는 성장배경이 달랐다. 명문가였던 만큼 집안에 인재들이 즐비했다. 박정희 처가의 주요 인물들은 ‘처형’인 육인순의 사위들이었다. 육인순은 22세에 춘천고보와 경성제대 법대를 나온 인텔리 홍순일(洪淳一)과 결혼했다. 일제때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낸 홍순일은 육인순과의 사이에 3남5녀를 낳았는데 6·25때 납북되었다.

육인순은 박정희가 권좌에 오른 직후인 1963년 서울시립부녀사업관장으로 임명됐고, 이어 당시 동대문구 망우동에 혜원여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박정희 재임 시절 처가쪽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인물이 육인순의 맏사위 장덕진(張德鎭·부인 洪銀杓)이다. 장덕진은 고려대 법대를 나와 사법·행정·외무 ‘3시’를 패스한 수재였다. 장씨는 재무부 이재국장 겸 대통령비서관, 재무부 재정차관보 겸 대통령외자관리 수석비서관, 경제기획원 차관, 농수산부 장관, 8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장덕진씨는 1980년대 말부터 국내정치에서는 발을 빼고 만주와 러시아로 눈을 돌려 사업을 벌이고 있다. 현 직함은 대륙종합개발 대표이사 회장이다

둘째 사위는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한승수(韓昇洙·부인 洪昭子). 춘천고·연세대 정외과·영국 요크대를 졸업하고 줄곧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지냈다. 6공 때인 1988년 13대 국회에 진출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6공과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상공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주미 대사, 부총리 겸 재경원 장관을 지냈다. 민국당 간판으로 16?선거에 당선된 뒤, 현 정부에서도 외교통상부 장관이 됐다. 장덕진과 한승수는 춘천고 동문이다. 한승수의 아들 한상준은 유니드라는 회사를 경영하는 이화영의 딸 이희현과 결혼했는데, 이화영은 동양제철화학그룹 명예회장 이회림의 아들이다.

동양고무벨트의 창업자 김도근의 장남 김진재는 박정희 시절부터 총력안보 부산시 협의회 특별위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부산시 청소년 선도위원, 부산 동래구 새마을지도자연합회 고문직도 맡았는데, 전두환이 급조한 민정당 간판을 달고 11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막론하고 내리 5선의원이 되었다. 이 김진재의 아들인 동일고무벨트 기획이사 1972년생 김세연이 한승수의 딸 한상은과 결혼을 했다. 그러니까 왜 한승수가 무소속으로 있다가 뒤늦게 또 다시 한나라당으로 들어갔는지 답이 나온다.한승수의 장인 홍순일은 일제때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낸 홍순일이다.

셋째사위는 유연상(柳然常·부인이 洪晶子)씨. 고려대 경제학과, 보스턴대 대학원 등을 나왔고 미국에서 증권회사를 다녔다. 영남투자 회장을 지냈고 영남대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다.

넷째사위 정영삼(鄭永三·부인 홍지자)은 현재 조흥관광진흥(한국민속촌) 회장이다. 박정희 재임 시절에도 모직회사를 운영하는 등 줄곧 재계에서 활동했다.

윤석민(尹錫民·부인이 홍재희)씨는 다섯째사위다. 청주고·고려대 법대를 나온 윤석민은 한국 해운업계의 ‘간판’이었던 대한선주 회장을 지냈고, 11대때 국민당 간판으로 국회에 진입해 국민당 부총재를 지냈다. 육인순의 사위인 장덕진·한승수·윤석민 3인은 비록 시기는 다르지만 국회의원을 지낸 ‘3동서의원’으로 헌정사에 기록됐다.

육인순의 장남 홍세표(洪世杓)는 춘천고·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평생 ‘뱅커’로 일했다. 현재는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이다. 차남 홍국표(洪國杓)는 미국으로 이민갔고, 막내 홍민표(洪民杓)는 현대자동차 상무이사로 재직중이다.

육인수

육인수(陸寅修)는 육영수의 오빠이며, 일제때 도쿄(東京) 무사시노(武藏野)고등공업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뒤 진명여고·대구고·서울고 등에서 수학 선생님으로 재직했다. 육인수는 공화당 공천을 받아 1963년 고향인 옥천·보은에서 출마해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평범한 교사에서 일약 선량이 된 것이다. 이후로도 육인수는 10대까지 내리 5선을 지냈다. 국회 문공위원장, 공화당 당무위원, 공화당 중앙위 의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육인수의 사위 이석훈은 청주 MBC 사장을 지내고, 충청일보 사장을 거쳐서 현재 일신산업 회장이다.

육예수

박정희의 처제인 육예수(陸禮修)의 남편은 무던한 성격으로 알려진 언론인 조태호(趙泰浩)다. 함남 북청 출신인데 해방후 고려대 총무과장으로 재직했다. 1965년에 ‘5·16 장학회’ 이사가 되었고, 문화방송 이사·디자인포장센터 이사장·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냈다. 말년에 “부산일보”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1988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