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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

기황후 시대에 등장하는 고려의 폐주는 충혜왕(충숙왕의 큰아들, 공민왕의 친형)인데 충혜왕은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폭군이자 악행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특히 섹스 스캔들로 악명이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2012년 SBS 드라마 <신의(神醫)>에서, 충혜왕이 '기쁨조'들과 어울려 놀면서 술에 취해 칼을 배들고 충신들을 아무렇게나 살해하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이 드라마가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엘-테무르(연철:燕鐵木兒)는 고려 충혜왕이 1328년 세자의 신분으로 대도(大都 : 베이징)에 머물 때 그를 친자식처럼 총애했다고 한다.(주1) 그러니까 드라마 <기황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엘테무르가 충혜왕으로 보이는 고려 폐주(왕유)를 매우 총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충혜왕은 실제로 원나라의 현실 정치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충선왕

원나라의 현실 정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고려왕이 분명히 있었다. 그는 바로 충선왕(忠宣王, 1275~1325)이다. 따라서 드라마의 왕유는 충혜왕과 충선왕을 합성해서 대충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충선왕[왕장(王璋) 원래 이름은 왕원(王謜)]은 충렬왕(忠烈王, 1236~1308)과 원 세조 쿠빌라이(khubilai khan)의 따님인 쿠툴룩켈리쉬(제국대장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선왕의 몽골명은 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로 세 살의 나이에 세자로 봉해졌다(1277). 이지리부카란 '어린 황소'라는 뜻으로 충선왕의 출생으로 고려와 원나라는 명실공히 일가(一家)가 되었다. 원세조(쿠빌라이 칸)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딸의 아들인 충선왕(외손자)을 매우 총애하였다고 한다. <익제난고(益齋亂藁)>에 따르면, 원나라를 방문했던 어린 이지리부카(충선왕)를 친히 편전에서 불러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느냐?"라고 묻기도 하였다.

<고려사>에도 충렬왕 18년(1292년) "10월에 황제가 왕을 침전(寢殿)에 불러들여 '(요즘) 무슨 글을 읽고 있느냐?"라고 물으니 왕(충선왕)이 대답하기를 통감(通鑒)을 읽었다고 말씀드리니 황제가 다시 말하기를 '그래 역대 제왕들 중에는 누가 가장 현명하더냐?'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대답하기를 한 고조(유방)와 당 태종(이세민)이라 하니 황제가 또 묻기를 '한고조와 당태종은 나(원세조)와는 어떠한고?'하였다. 이에 왕은 '제가 아직은 어리니 어찌 이를 제대로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라고 나와 있다.

十月帝召王入寢殿問曰: "讀何書?" 奏云: "讀通鑑." 帝曰: "歷代帝王誰爲賢明?" 對曰: "漢之高祖唐之太宗" 帝又問曰: "漢祖唐宗孰與寡人?" 對曰: "臣年少何足以知之." 帝曰: "然問於宰相以來." <高麗史>33卷-世家33-忠宣王1

아버지인 충렬왕이 주로 사냥이나 하러 다니고, 애첩인 무비(無比)와 즐겨 놀았기 때문에 어린 충선왕은 주로 어머니와 함께 있었고 의지하였는데 1297년 5월 그의 어머니가 39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다. 충렬왕은 왕비(원세조 따님)가 죽은 관계로 원나라 6대 성종(테무르)에게 표를 올려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할 뜻을 밝혀 1298년 1월, 세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충선왕이 되었다.

역대 제왕들 가운데서도 충선왕은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총명하고 학식도 풍부했다고 한다. 특히 민초(民草 : 가난한 백성)들의 삶과 관련하여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의 실각을 가져오기도 했다.

충선왕은 즉위 후 인사 제도부터 시작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지만 이에 대한 반발이 극심하였다. 특히 기존의 권문세가나 기득권층들의 반발이 심했는데, 이들은 충선왕과 그 왕비인 부타시리(계국대장공주 : 원세조의 손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점을 들추어내면서, 동시에 개혁 정책의 문제점 등을 들어 원나라 조정과 합동으로 공격하였다. 결국 충선왕과 공주는 원나라로 불려 들어갔고 이에 대한 문책으로 충선왕은 불과 7개월 만에 폐위당하고 충렬왕이 복위되었다.

이로부터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충선왕은 충렬왕의 유일한 적자(嫡子)이지만 아버지가 애첩인 무비(無比)만을 총애하는 등 어머니를 멀리했기 때문에 부자간의 사이가 나빴다. 왕위에서 물러난 충선왕은 원나라에 머물면서 숙위(宿衛 : 일종의 정치적 볼모)가 되었고 10여 년 간을 보내게 된다. 충선왕은 원나라 조정에서는 어리고 정치경험이 없고 미숙한 정치가로 낙인이 찍혔고, 고려에서는 기득권 세력이나 보수층으로부터 현실을 모르는 지나친 '개혁마니아'로 몰렸으며, 아버지인 충렬왕과도 극심한 불화상태에서 원나라에서 고독한 정치적 볼모로 살아가야 한 것이다. 충선왕으로서는 이 시기가 최악의 시련의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충선왕에게는 오히려 자신을 단련하는 시간이 되었다. 지난 정치에 대한 반성과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던 기간이었고 새로운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는 하나의 기회가 서서히 태동하고 있었다.

충선왕은 이 기간에 원의 종실(宗室)인 카이산(海山, Qaisan : 후에 무종), 아유르바리바드(Ayur-Baribad : 후에 인종) 등과 형제 이상으로 가까이 지냈다. 무종(武宗)과 인종(仁宗)은 당시 황제인 성종(成宗 : 테무르)의 조카였고 충선왕이 성종의 처사촌(妻四寸)이므로 가까운 인척 관계였다. <고려사>와 <익제난고(益齋亂藁)>에 "원나라의 무종(카이산)과 인종(아유르바리바드)은 잠룡(潛龍 : 황위에 오르기 전의 상태를 말함) 시절에 충선왕과 더불어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고 밤낮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라고 할 정도로 이들은 가까운 사이였다.

武宗,仁宗龍潛。與王同臥起。晝夜不相離。

그러던 가운데 1307년 후사가 없었던 원 성종(成宗)이 병사하자 원 황실 내부에서 격렬한 황위 쟁탈전이 발생하였다. 당시 유력한 후계자는 성종의 사촌 아난다(阿難達, Ananda : 안서왕)와 성종의 조카인 아유르바리바드(후에 인종)가 유력한 후보였는데 이 당시 충렬왕은 원나라 조정의 대세에 따라 아난다를, 충선왕은 당연하게도 늘 함께 지낸 아유르바리바드를 지지했다. 당시 황후인 불루칸(卜魯罕 Buluqan)과 승상 아쿠다이(阿忽台, Aqudai)는 아난다를 옹립하려 하였다.

이에 아유르바리바드(후에 인종)와 그의 어머니 타지(答己)(주10)와 충선왕 등은 정치적 쿠데타를 결의하였다. 이런 와중에 1308년 2월 아난다가 원나라 수도인 대도(베이징)에 들어오자 아유르바리바드 일파가 그를 체포했고 충선왕은 아난다를 옹립하려는 세력들을 직접 제거하는 일을 맡았다. 이로써 궁중 쿠데타는 성공하고 카이산이 먼저 황위에 올라 7대 무종(武宗)이 되었고(1308), 그다음에 아유르바리바드가 8대 인종(仁宗)으로 즉위했다(1311).

충선왕은 이 공로로 일등 공신이 되었으며 1308년 5월 무종은 충선왕을 심양왕(瀋陽王)으로 봉했다. <고려사>에는 원황제 무종(武宗)이 "아아! 그대, 추충규의협모좌운공신(推忠揆義恊謀佐運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좌승상(左丞相) 부마(駙馬) 왕장(王璋 : 충선왕)은 세조(쿠빌라이칸)의 외손자요, 전대부터 귀한 사위(貴壻)로서, 짐이 선조의 사직을 계승하는 위업[纘承]에 처음부터 참여하여 짐을 크게 도와주었도다[參翊贊之功]. 선한 일을 더 높이고 악행을 징벌하는 대의의 큰 정신으로 아버지에게 효를 다하고 임금에게는 충성을 다하는 큰 모범을 보전하게 할 것이니 가히 개부의동삼사 태자태부(太子太傅) 상주국(上柱國) 부마도위(駙馬都尉)를 특별히 수여하고 심양왕을 진봉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중서성(中書省)에 들어가 정사에 참의하게 하고 김호부 옥대 칠보대 벽전금대 및 황금 500량 은 5000량을 하사하였으며, 황후나 황태자도 또한 충선왕을 극진히 대접하도록 하게 하여 각종 보물과 비단 등 갖은 귀한 하사품들은 가히 이루 다 헤아리지 못 할 만큼 되었다"고 한다.

三十四年五月戊寅元以定策功封瀋陽王制曰:"咨爾推忠揆義恊謀佐運功臣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駙馬王璋世祖外孫先朝貴壻方朕纘承之始寔叅翊贊之功. 以賞善罰惡之至公保孝父忠君之大節可特授開府儀同三司太子太傅上柱國駙馬都尉進封瀋陽王."又令入中書省叅議政事賜金虎符玉帶七寶帶碧鈿金帶及黃金五百兩銀五千兩. 皇后皇太子亦寵待所賜珍寶錦綺未可勝計. (<高麗史>33卷「世家33-忠宣王1」)

여기에서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는 부분은 충선왕이 도대체 무슨 지위를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충선왕이 심양왕과 고려왕(이즈음 충렬왕이 사거함)이 다시 됨으로써 한반도와 요동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서성(中書省)에서 원나라의 각종 국사에 참의하게 함으로써 원나라 조정의 실세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충선왕이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태자태부(太子太傅)는 황태자에게 학문을 전수하는 사람으로 충선왕이 황태자의 스승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종과 인종이 충선왕과 동고동락하면서 충선왕의 많은 조언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충선왕의 학식과 교양에 깊이 매료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 제국의 다음 세대의 황제의 스승이 되었다는 것은 충선왕이 어떤 지위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할 부분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이다. 개부의동삼사는 황제 다음 가는 지위이기 때문이다. 즉 충선왕이 개부의동삼사가 되었다는 것은 원나라 권력의 제 2인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서 말하는 삼사(三司)는 태위(太尉) ·사도(司徒) · 사공(司空) 등으로 삼공(三公)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관직은 중국에서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국가의 대사를 관장하는 최고의 관직이다. 그러니까 개부의동삼사란 이 삼공에 준하면서 부(府) 즉 관청을 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본의 사카모토요시타네(坂元義種) 교수에 따르면, 송나라를 기준으로 송나라 황제가 이 개부의동삼사를 인정해준 사람은 4명뿐이었다. 그 만큼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고 영향력이 있는 작호인 셈이다. <삼국사기>「장수왕」51년조(463년)에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송나라 세조로부터 정동대장군고려왕(征東大將軍高麗王)이라는 작호에서 거기대장군개부의동삼사(車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로 격상되었다.

坂元義種<ゼミナ―ル日本古代史(下)>(光文社 : 1980) 385∼387쪽.

이상을 보면 충선왕이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왕은 단순히 식민지의 왕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학문적으로는 심양왕의 실질적인 권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주로 일본 학자)들이 있으나 적어도 충선왕의 경우에는 틀린 견해이다. 1308년 7월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은 고려 국왕으로 복위했지만 아버지인 충렬왕의 전철을 그대로 밟기도 했다. 여러 가지 성적인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하고 측근 정치에 몰두했으며 아예 고려는 관심이 없기도 했다. 세계를 지배하던 원나라 국정을 주무르던 그에게 고려는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충선왕은 세계 제국의 2인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충선왕은 국왕에 오른 뒤에도 원나라로 돌아가 1313년 3월까지 5년간 단 한 차례도 고려에 오지 않았고, 대도에서 전지정치(傳旨政治) 즉 신하들에게 교지(명령)를 내려 국정을 처리하는 정치로 고려를 다스렸다. 충선왕이 고려에 돌아가지 않자 원나라 황제가 직접 나서 귀국을 종용하기도 했고 결국 충숙왕(忠肅王, 1294~1339 : 충선왕의 둘째 아들)에게 양위하기도 했다. 충선왕은 양위 후에도 고려 국정을 간섭하기도 했고 심양왕 지위를 아들인 충숙왕에게 넘겨주지 않고 조카인 왕고(王暠 : 연안군)에게 물려줌으로써 이후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1320년 인종이 죽고, 영종(시데발라 : 인종의 아들)이 즉위하면서 그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12여 년에 걸친 하늘을 찌르던 그의 권력도 기울게 되었다. 결국 원나라 인종(仁宗: 아유르바리바드)의 후비인 고려인 바얀-코토크(伯顔忽篤, Bayan- Khutug)와 고려 출신 환관 임빠이엔토쿠스(任伯顔禿古思)의 모략으로 인해 티베트로 유배되었고, 1323년 그의 매부(妹夫)인 태정제(진종)가 즉위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2년 후에 서거하였다.(놀랍게도, 바얀 코토크는 충선왕의 의붓딸이다.)

출처: 프레시안: 기황후의 왕유, 충선왕과 충혜왕의 합성 캐릭터? (201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