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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정림사지는 백제말 123년의 도읍기를 통틀어 남아있는 유일한 백제유적으로 백제 시비도성 건설과 함께 세워져 왕실의 흥망성쇠와 함께 한 곳이다. 남북 일직선상의 중문, 탑, 금당, 강당순의 백제가람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고려시대(1028년)에 제작된 명문을 통하여 정림사지라 불리고 있다. 백제문화권정비사업의 핵심 사업으로 주변부지를 매입하고 발굴조사를 거쳐 가람터를 정비하여 오늘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다.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 석탑에 반하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준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 층 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기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높이 8.3미터. 출처: 정림사지 박물관.

정림사지 5층석탑

부여,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다. 의자왕은 허망하게 나라를 잃고 포로 신세가 되어 중국으로 끌려갔다. 상류층 부녀자들과 궁녀들은 산성 끝 절벽까지 내몰렸다가 몰려드는 당군을 피해 꽃처럼 벼랑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꽃이 진 낙화암(落花岩) 아래로 조용히 강물이 흐른다. 그 시퍼렇던 강물 위로는 작은 유람선들이 관광객을 싣고 평화로이 오가고 있을 뿐이다.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탑, 한때 평제탑(平濟塔)이란 이름을 가졌던 탑이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신라 장군 김유신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왕을 중국으로 끌고 가면서 정림사 5층석탑 1층 탑신에 자신이 백제를 평정하였다는 공적(?)을 늘어놓았는데, 그 때문에 한동안 이 탑은 소정방이 세운 것으로 오해되었고, 그 이름조차 평제탑이라 명명되는 수모를 받아왔다.

국보 제9호로 충청남도 부여시에 있는 이 탑은 화강석재 149매를 잘 짜맞추어 올린 높이 8.33m의 석탑이다. 정림사지 입구에는 ‘백제’초등학교가 있어 ‘이 곳이 바로 백제의 옛땅’이라는 실감을 저절로 느끼게 해준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좁고 낮은 1층 기단(基壇)과 그 위에 세워진 5층 탑신(塔身)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 국보 제9호인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한때 소정방이 세운 것으로 오해받아 이름조차 평제탑으로 전해져 왔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층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이 탑이 목조건물의 구조와 비슷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이 바로 정림사지 5층석탑의 특징이다.

목조 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또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와 장중한 의용을 동시에 자랑하는 이 탑은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 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부여는 1주일을 두고 밤낮 없이 나당연합군이 지른 불길에 파묻혔다고 하는데, 그 때의 화염에 정림사는 불타 없어지고 5층석탑은 온 몸에 짙은 그을음을 두른 채 아직까지 남아 외침에 나라를 잃고만 백제인의 설움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게다가, 무려 1만8천여 평이나 되도록 넓은 정림사지에는 이 탑을 제외하고는 거의 남아 있는 건물이 없어 더욱 망국(亡國)의 한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5층석탑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건물이 눈에 띄지만 이는 백제 때 지어진 것이 아니라, 보물 제108호인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해 1993년에 세운 최신식 건축물이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 때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 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림사는 주요 건물을 배치할 때 중문(中門), 5층석탑, 금당(金堂), 강당의 중심 축선(軸線)을 남북 일직 선상에 놓고, 이를 회랑(回廊)으로 두른 장방형(長方形)의 평면 위에 남북일탑식(南北一塔式) 가람 배치(伽藍配置) 방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7세기 일본의 사찰가람에 영향을 주어 고대 일본의 사찰 가람배치의 본이 되었다.

충장사 계백장군묘

▲ 논산 인근 계백장군유적지 안에 있는 충장사. 장군을 기리는 이 사당 오른쪽 솔숲 속으로 들어가면 장군의 묘가 있다.

부여를 떠나 대전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백제의 마지막 자존심을 상징하는 계백을 만난다. 논산을 비껴 약간 동북쪽으로 달리노라면 거대한 호수를 오른쪽으로 두고 계백 장군 유적지가 잘 정비되어 있다. 이 일대가 바로 황산벌이다. 유적지에는 군사박물관도 있고, 장군을 기리는 충장사(忠壯祀)도 있다.

물론 장군의 무덤도 있어 먼 길을 달려온 이의 마음을 사뭇 애잔하게 만든다. 백제인으로는 유일하게 동상이 세워져 있다는 계백, 장렬하게 죽음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주었다. 다만 황산벌 결전을 앞두고 스스로 부인과 자식을 참살하였으니 유적지에 그의 무덤 하나만 댕그라니 놓여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승자박이려니!

출처: 오마이뉴스 (2006.11.01)

참고: 당평제비(唐平濟碑): 한국 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작성: 2015.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