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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오다이바 다이바공원

다이바공원과 레인보우브릿지

다리(레인보우브릿지) 입구에 오면, 오른쪽에 주차장이 있고, 왼쪽에는 사진과 같은 예전의 포대가 남아있는 작은 섬이 있는데 오다이바 지역 중에서도 다이바공원(台場公園)으로 부릅니다. 일본도 서구의 침략에 처음에는 경계를 하여, 이러한 포대를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다이바'란 포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다이바(お台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됩니다.

오다이바 지명의 유래와 일본의 개항

1853년에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제독이 이끄는 미국해군함대 4척이 지금의 도쿄만(東京湾)인 에도만(江戸湾)에 들어와 쇄국을 하고 있던 일본에 대하여 개항을 요구하며 도쿄만을 측정한 뒤에 오키나와로 돌아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에도막부(江戸幕府:당시의 일본정부)에서 외세에 대한 방어의 목적으로 포대를 만들었는데 이러한 포대를 일본어로 다이바(台場)라고 부른다.

이듬해인 1854년 2월 13일에 페리함대는 7척의 배를 이끌고 다시 찾아와 조약체결을 요구하여 같은 해 3월 31일, 요코하마에서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 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 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이즈반도(伊豆半島)에 있는 시모다(下田)와 홋카이도에 있는 하코다테(函館)를 개항하게 되고, 페리함대는 지금의 오키나와(沖縄)인 류큐왕국(琉球王国)으로 입항한 후에 류큐왕국과도 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은 붕괴하게 된다.

미일화친조약은 불평등조약으로 이 조약의 체결로 그 후에 서구의 여러 열강으로부터 개항의 압력을 받게 되었으며, 1968년의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힘을 키워 온 일본은, 1876년에 강화도로 쳐들어와(운요호사건) 서구열강에 당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조선에도 조약체결을 요구하게 되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조선은 인천과 원산을 개항하게 된다. 같은 불평등 조약을 체결당하는 과정에 있어서 조선이 치열하게 대항했던 것과는 달리, 일본은 포대까지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이바(台場)와 관련된 전투에 대한 기록이 안 보이는 것으로보아 비교적 순순히 조약을 체결한 듯 하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일본의 행동은 이후에 일본이 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는 발판이 되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인들의 민족성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다이바'라는 이름이 생겼는데 1979년 도쿄항의 물동량이 증가함에 따라 도쿄항 바닥의 준설공사를 하면서 퍼 올린 흙을 이용하여 인공매립지를 만든 것이 지금의 오다이바(お台場)이다.

일본 요코하마(横浜)에 있는야마시타공원(山下公園) 근처에는 요코하마 개항 자료관(横浜開港資料館)이 있다. 일본의 개항과 관련된 역사자료를 보고 싶은 분은 한번 가 보시기를....

오다이바 여행지도